◀ 옥림리 중성발굴터에서 발견된 고려청자 파편.
고려, 몽고 전술 간파…3차침입 격파

송문주 지휘…군사·백성 목숨건 항전

최항, 장기전 대비 중성 필요성 역설

고종 37년 축조…2천960칸·17문 규모




'중성'의 흔적은 산 하나를 온통 뒤덮고 있었다. 발굴조사로 파헤쳐진 황토는 부드러웠다. 등산화를 신은 발이 푹푹 빠졌다. 마치 눈밭을 밟는 느낌이다. 발굴지 군데 군데 넓게 펼쳐진 새파란 비닐덮개는 '고분'과 '건물'이 있던 자리다. 흙 속에 박혀 푸른 빛깔로 반짝이는 청자 파편, 두툼한 기와 조각들. 성벽까지 오르는 동안 무수한 고려의 영혼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까지 확인된 중성발굴터는 이 곳 '강화읍 옥림리'와 '선원면 창리' 두 군데이다. 두 곳 모두 도로공사를 하던 중 발견됐다. 현재 도로공사는 양쪽 모두 중단된 상태다.


처인성에서 몽고 총사령관 '살리타이'가 사살되는 등 고려의 항전이 예상보다 치열하자 몽고는 일시적으로 고려에서 발을 뺀다. 그러나 1235년 3차침입을 단행, 1239년까지 전쟁을 벌인다. 눈에 띄는 고려의 항전은 1236년 안성의 '죽주성 전투'다.
성 가까이 다가온 몽고군이 금방이라고 성벽을 부수고 들어올 것처럼 시위를 벌였다. 성 밖을 내다보는 방호별감 송문주 장군의 표정은 그러나 태연했다. 그의 뒤에서 대기하던 군사와 백성들의 손엔 창과 화살, 크고 작은 돌이 쥐어져 있었다. 성 안 여기저기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쇳물과 물을 끓이면서 나는 증기였다.
성 밖에서 대장으로 보이는 몽고장수가 소리쳤다.
"어서 성문을 열고 우리를 정중히 맞이하라! 감히 대몽고제국에 대항하려 한다는 말이냐!"
송문주 장군이 껄껄껄 웃더니, 몽고군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이런 가소로운 오랑캐 놈들 같으니라고. 지금 당장 물러가면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렇지 않는다면 네 놈들 나라까지 쳐들어가 삼족을 멸하리라!"
몽고장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몽고군이 개미떼처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송문주는 몽고가 성을 공격하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장군이었다. 1231년 몽고의 1차 침입 때 이미 몽고와의 전투를 치른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송문주는 국경지역인 평안도 귀주의 박서 장군 밑에서 싸운 경험으로 몽고의 전술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몽고군은 역시 첫 번째 방법으로 목재 방어벽을 밀며 성벽으로 다가왔다. 그 다음은 긴 사다리로 성벽을 기어오를게 틀림없었다. 몽고군은 이어 거대한 투석기로 불화살을 날려보낼 것이었다. 그마저 실패한다면 성벽 아래 굴을 파고, 이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동물시체를 날려보내 병을 퍼뜨리거나 성을 포위해 굶겨 죽이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놈들은 오합지졸일 뿐이다! 자~, 나를 따르라!"
고려군은 송문주의 지휘에 따라 민첩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고려군은 우선 용광로에 녹인 쇠를 성벽 구멍을 통해 흘려보냈다. 쇳물을 뒤집어 쓴 누차가 불길에 휩싸였다. 몽고군들이 타서 죽고, 떨어져 죽었다. 송문주가 다시 소리쳤다.
"지금쯤 놈들이 두더지처럼 땅 밑을 파고 있을 것이다. 내려가서 버팀목을 불태워 버려라!"
몽고군은 정말 갱도를 파고 있었다. 고려군이 목재버팀목에 불을 붙였다. 몽고군이 비명소리가 갱도속에 파뭍혔다.
마침내 몽고군들이 공포에 질려서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보름동안 계속된 전투에서 백전백패한 몽고군은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1247년. 몽고의 새로운 황제 '꿰이유'(정종)는 재침입을 단행한다. 이름하여 '4차 침입'이다. 이는 4차 침입 전, 몽고가 고종임금을 보내라는 등 수차례 투항할 것을 요구했음에도 강도(江都)정부가 번번이 거부한 데 따른 보복이었다.
4차 침입 이후에도 고려는 역시 강력한 항전의지로 전투에 임했다. 몽고와의 전쟁 과정 속에는 송문주 장군과 같은 명장들도 있었지만 이름없이 죽어간 백성, 군사들이 더 많았다. 그들 '무명씨'들은 나라를 살려야 내 가족이 산다는 애국심으로 아침이슬처럼 사라져 갔다.
고려는 한편으로 대화를 제의하기도 했다. 1248년 2월 고려는 추밀원사 손변과 비서감 환공숙을 몽고에 파견했다. 철군요청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강온 양면작전'을 쓰면서 고려는 또하나의 성을 쌓기 시작한다. 몽고가 네번 째로 침입한 지 3년이 되던 1250년, 최항이 대신들을 소집했다. 1249년 아버지 최우가 사망하자 권력을 승계한 그 였다.
"오랑캐들의 움직임을 보아 우리의 싸움은 생각보다 오래갈 것이 틀림없소. 이미 내성과 외성이 있으니 궁성은 물론, 도읍을 보호할 수 있는 '중성'을 하나 더 쌓도록 합시다."
중성은 그렇게 몽고에 대한 장기적인 항쟁의지를 품고 도읍을 둘러싼 성으로 축조됐다.

/글·사진=김진국 기자 blog.itimes.co.kr/freebi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