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미추홀 ( 566 )
"남쪽 백성들은 모두들 거리에서 통곡하고 글을 지어 제사했다"(李恒福 左水營碑). "고기 먹는 이가 없었고, 흰 옷 안 입은 사람이 없었다. 그것이 풍속이 되어 혼인 때가 아니면 무색옷을 입지 않았다."(湖南紀聞).
선조 31년(1598년) 12월 16일 이른 아침 노량 바다. 친히 북을 두드리며 적을 추격 중이던 충무공이 왼쪽 겨드랑이에 탄환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그 부음에 백성들이 얼마나 슬퍼 했었는지를 기록한 대목들이다.
그 후대 임금인 숙종은 현충사 제문에 "절개에 죽는단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 이분에게서 처음 보네"라며 공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밝혔고, 정조는 직접 '충무공전서'를 편찬케 했다.
올해로 충무공이 순국한 지 412주년이다. 그러나 이 나라 국민들은 다시금 큰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생떼 같은 내 자식이요, 남편인 '천안함 46 용사'들의 희생에 온 국민이 애통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북쪽에서는 체제 유지용이라지만 남쪽의 슬픔은 아랑곳없이 보란 듯 화려한 '불꽃놀이'를 하고 있으니 냉엄한 '민족의 현실'을 또한번 소름 돋게 실감하게 되는 요즈음이다.
정부가 '국가애도기간'과 '국가 애도의 날'을 정했다고 발표했다. 인천시청 앞 광장에도 분향소가 설치됐다. 자숙하며 '천안함 46 용사'들을 추모하는 것은 국민된 도리이다. 더불어 인천상륙작전 때보다 더 많은 장병이 희생된 사태의 진상을 밝히고, 그 책임을 끝까지 물어 그들을 신원(伸寃)해 주어야겠다.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