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소에 수용된 죄수들의 하루 일과는 생활준칙에 따라 시작되었다. 새벽 다섯 시에 기상하면 감방 선생이 들어와 기상상태를 점검했고, 세면 후는 줄을 그어놓은 개인의 자리로 건너가 무릎을 꿇고 앉아 교화소 생활준칙을 암기했다. 그러다 벽에 붙은 스피커를 타고 조선중앙방송이 중계되면 그 방송내용을 청취하면서 사상학습을 했다.

 휴식시간에도 선생(보위원들을 그곳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이 들어와 편안히 앉으라고 해야만 다리를 펴고 앉을 수 있었다. 그때도 수용자들은 옆 사람과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눌 수 없었다. 수용자들이 제멋대로 옆 사람과 잡담을 나누면 학습 선생은 벼락같이 고함을 지르며 『독방에 들어가고 싶으냐?』고 되물었다. 수용자들은 그 소리에 질려 하루종일 선생의 눈치만 살피며 생활했다.

 변소에 가는 것도 선생은 하루에 딱 세 번만 허용했다. 처음에는 익숙해지지 않아 바지에 그대로 용변을 보는 수용자들도 있었다. 그래도 선생은 습관화시킨다고 개인적인 변소 사용을 금지시켰고, 밤 12시가 넘어야 잠자리에 들게 했다.

 신입자들 방에서 생활준칙을 통달하고 나면 단체생활을 하기 위해 수용자들은 군대식으로 소속 중대와 소대, 그리고 분대가 결정되었다. 그 뒤 숙소도 결정되었다. 남자들은 모두가 공동으로 쓰는 합숙소로 배치되었지만 여죄수들 5명은 오두막집으로 배치되었다.

 성복순은 2중대 3소대 1분대에 배치되었다. 숙소는 다른 여죄수들과 같이 오두막집에 배치되었다. 교화소에 처음 들어온 날 인솔 보위원을 따라 관리소 안으로 걸어가면서 본 산비탈의 오두막집은 안내해 주는 선배 여죄수를 따라 가까이 다가가 보니까 멀리서 보기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것은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 이름 붙이기보다는 차라리 짐승을 키우는 축사라고 하는 것이 더 마땅할 것 같았다. 벽은 군데군데 허물어져 바깥바람이 몰아쳤고, 지붕에는 이름 모를 풀씨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뿌리를 내려 자라고 있었다. 그런 지붕을 이고 서 있는 기둥과 벽에다 거적을 덮어씌워 바깥바람을 막으며 방과 부엌을 만들어 놓았는데, 습기가 차서 오두막이 허물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온돌을 깔아 대열과에서 비준한 여죄수들에게만 그곳에서 기거하게 한다고 따라 나온 선배 여죄수는 알려주었다.

 방바닥에는 삿자리가 깔려 있었다. 부엌에서 불을 때면 매캐한 연기가 새어나와 콧구멍을 따갑게 해도 떼거리로 모여 집단생활을 하는 합숙소보다는 마음이 한결 편하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런 오두막에는 보통 한 집에 방이 두 칸씩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방마다 3∼4명의 여죄수들이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각 방에는 관리소 대열과에서 비준한 고참 죄수가 방장으로 있다고 했다. 그들은 엄격한 큰언니나 시어미처럼 함께 기거하는 여죄수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사생활을 지도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