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기가 이 땅에 처음 들어온 것은 갑신정변 때 민영익을 치료해 전의가 된 알렌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그 무렵 원통식(실린더 식)이었던 유성기는 1904년에 이르러 비로소 독일인 '오데온'에 의해 양면 레코드로 발전했다.
국내 최초로 원반 레코드가 발매된 것은 1908년 '빅타' 사에 의해서였는데, 이동백(李東伯)이 '적벽가'를 불렀다. 그 후에도 판소리, 찬송가, 가곡 등이 주로 취입되었다가 1925년에 이르러 '이 풍진 세상' 같은 가요가 나왔다. 그 이듬해엔 비련의 주인공 윤심덕이 '사의 찬미'를 불렀다. 사상 최초의 인기곡으로 떠올랐던 이 노래는 '이바노비치'의 '도나우 강의 잔물결'에 가사를 붙인 것으로 근대적 의미의 대중가요가 붐을 이루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아직은 작사, 작곡이 번안 내지는 표절의 단계였다. 가요사를 기술한 이들은 1929~30년에 김서정(金曙汀)이 작사ㆍ작곡한 '낙화유수(일명 강남 달)'와 '봄노래 부르자(일명 봄노래)'를 최초의 창작가요으로 치고 있다.
가요계의 황금기는 1932년 전수린(全壽麟)이 작곡하고, 이애리수가 불러 불후의 명작에 오른 '황성옛터' 이후라고 보고 있다. 그 무렵의 작곡가인 김교성, 김해송, 박시춘, 이재호 등은 민족의 애환을 달래주었던 주역들이다. 광복 후, 우리 가요의 맥을 이어온 작곡가 박춘석(朴椿石) 선생의 부음을 접했다.
그간 국민과 함께 희로애락을 같이해 오면서 무려 2천700여 곡이나 창작하고, 내로라하는 당대 최고의 가수들을 키워왔다니 '우리 시대의 가요 왕'이라 감히 일러드리고 싶다. 월미도에 나가 '바닷가에서'(박춘석 작사ㆍ작곡, 안다성 노래)의 가사라도 나직이 읊조려봐야겠다.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