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野球)가 인천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졌다는 사실은 몇 해 전 인고ㆍ동산ㆍ제고 총동문회가 함께 펴낸 '인천야구 한 세기'에도 수록돼 있다. 1920년대 '웃터골운동장'에서 벌어진 각종 경기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그때부터 야구는 인천 스포츠의 대명사였다. 1934년 인천중학교가 설립되면서 구장을 인적이 드물었던 도원동으로 옮겼는데, 그 2년 뒤엔 정면 1천 석, 좌우측 각 2천 석 등 5천 석 규모의 제법 큰 야구장을 완성하였다.
인천 야구의 전설을 화려하게 만들어 간 유완식(일본 한큐브레이브스), 김선웅, 장영식(일본 갑자원대회 출전), 박현덕(연희전문 선수) 선수 등이 도원동 야구장에서 꿈을 키웠던 것은 지역사회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런 중에 일제가 야구를 '적국(敵國)의 스포츠'라며 중지시키고, 식량을 증산한답시고 여고생들을 동원해 야구장에 콩을 심는 등 기괴한 발악을 하기도 했지만, 광복 후 청춘을 불사른 백구(白球)의 향연은 다시 펼쳐졌다.
인천고와 동산고의 활약상은 길이 빛날 위업이었다. 인천고와 동산고가 황금사자기, 청룡기, 봉황대기 등에서, 그리고 후발 제고가 화랑대기 등에서 벌인 명장면, 명승부들은 아직도 시민들의 뇌리에 생생하게 살아있을 듯싶다.
그러나 세월의 탓인가? 인천야구의 산실이었던 도원동야구장마저 재개발로 헐려 본사 주최 '미추홀기 대회'도 올해부터는 자리를 옮겨 벌여야 할 판이 됐다.
마침 동산고가 인천의 명예를 드높였던 무대인 황금사자기대회에서 첫 완봉승을 거뒀다는 기쁜 소식이다. 부디 선전해 고교야구 부활의 기폭제가 되기 바란다.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