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눈
우리는 평생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사람들을 평가하고, 비판하고, 비난하면서 살고 있다. 다른 사람을 칭찬하거나, 격려하는 것보다는 비판하고, 평가하는데 더 익숙해져 있다. 자신에 대해서는 무던히 후덕하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하여는 냉철하게, 자기입장에서 판단한다. 그래서 사랑도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멘스라고 하지 않는가.
성경 말씀에 다른 사람 눈의 티끌은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결국 자신의 삶을 평가 받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 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최후의 판단, 심판은 신 즉, 하느님의 몫이다. 경인년 새해 오랫동안 병환에 계시던 장모님이 온천지가 하얗게 변한 날 하느님의 부름으로 귀천하셨다. 기상 관측 이후 최고의 적설량과 추위 속에서 삶을 마감하시고, 하느님의 심판을 받으러 가셨다.
장모님이 중환자실에서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촌각을 다툴 때, 인간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의 진정한 뜻, 의도는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죽음을 순종하면서 즐거움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일까. 꼭 이런 모습으로 가야하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중환자실에 있는 늙고, 병들고, 메마르고, 초라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보면 은행에서 대기표를 받거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음식을 시키고 번호표를 받아들고 부름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죽음의 번호표를 받아든 사람들 모습 같다.
왜 하느님은 인간 최후의 모습을 이런 모습으로 만드셨을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용히 묵상을 해보니 아마도 평가와 심판을 받는 자는 당당하고, 잘나고, 떳떳한, 위풍당당한 모습이 아니라 겸손하고, 나약하고, 힘없고, 초라하고 불쌍한 모습이어야 하느님께서도 정상을 참작하시어 후한 평가를 주시지 않을까. 또한 그러한 모습이 심판을 기다리는 자의 참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많이 비난하고, 비판하고, 평가했는가. 비난과 비판은 상대방을 화나게 만들고 한이 맺히게 한다. 비난과 비판이 아니라 순수한 평론과 비평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평론가, 비평가는 있을지언정 비난가, 비판가는 없다고 한다. 사람을 평가하고, 심판하는 것은 인간의 잣대로 섣불리 해서는 안 된다. 영국의 대문호 닥터존스는 "하느님도 한 인간을 심판하고, 판단하려면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인내하고, 참고 기다린다." 고하였다.
우리가 삶을 평가받을 때, 최후의 심판 날에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은 평가와 심판을 받을 것인가. 선하게, 덕을 쌓으며, 배려와 나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될 것 같다. 옛날부터 선한 끝은 있다고 하였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고 하였으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는 것은 기적과도 같다고 하였다.
지장, 용장, 덕장 중에서 최후의 승자는 덕장이며, 성을 공격하는 것은 하수요, 사람의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고수이다. 삶을 평가받는 날 즉,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자식들이 우리부모님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였고, 닮고 싶은 사람이었다고 말하면 성공한 인생이고, 부모, 형제, 자식이 아닌 제3자가 나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면서 내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려준다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한다.
내가 태여 날 때에는 나 혼자 울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웃게 하시고, 내가 죽었을 때는 나 혼자 웃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울게 해 달라는 어느 현자의 기도문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삶을 올바르게 평가 받기 위해서는 남을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을 모두에게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알려주는 바른 인성교육이 정말로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최종설 인천 중앙도서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