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미추홀
19세기 조선 팔도의 산 대부분이 '민둥산'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비숍 여사는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헐버트 박사는 '대한제국멸망사'에서 '반도의 어느 곳을 가나 벌거숭이산뿐이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남벌이 계속돼 산림자원이랄 것이 없었는데 그같은 사정은 광복 후에도 거의 같았다. 재목을 쓰자니 원목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최대 소비지인 수도권의 항구도시 인천이 자연스레 목재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1969년 간석사거리의 포도밭을 임대해 창업한 '영림목재(주)'는 그 중의 후발업체였다. 초기 이 회사는 대성목재 등 대기업에서 원자재를 구입해 샘표식품, 삼학소주, OB맥주 등 각종 목상자를 생산해 기반을 닦아 갔다.
그 후 각고의 노력으로 목재 파렛트, 악기 자재 개발, 특수목재 사업, 고급 원목가구 생산, 데크블럭 생산, 목조 건축 시공, 명품 서재가구 생산, 국산재 사용 방안 연구 등으로 업계의 선두주자로 부상해 오늘에 이르렀다.
이 회사 이경호 대표이사는 목재 연구가이자 국산재 활용을 실현한 살림산업 유공자, 능란한 영어를 무기로 수출 전선에 나선 기업가, 메세나운동을 실천해 온 애향인 등 다방면으로 활약해 소리 없는 박수를 받고 있다.
최근에는 '영림목재, 마흔 나이테'라는 제목의 두툼한 사사(社史)를 펴냈다.
40년간의 역정을 일별해 보니, 오늘에 이른 사업이 개인적인 성취에만 머무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와 같이 지역사회와 더불어 상생하는 '아름다운 향토기업'들이 여러 분야에서 속속 출현했으면 하는 소망이다.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