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천장 … 정조의 소박함 고스란히 배어

탈권위·형식 흔적 … 단순한 사당 개념 초월


의민족. 화령전이 흰 옷을 입었다. 눈은 솜옷처럼 두툼하게 '운한각'을 감싸고 있다. 운한각 안에서 정조대왕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다.
공손한 마음으로 운한각에 발을 들여놓는다. 운한각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을 때, 왼편에 서 있는 두 개의 기둥 사이 공간은 '서고'였던 곳이다. 학문을 좋아했던 정조를 위해 신하들은 서고를 만들었다. 지금은 단 한 권의 책도 없지만 과거 이 곳엔 조선 최고의 신간들로 넘쳐났었다. 그 시절을 웅변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기둥 한가운데로 난 창호지문이 햇살을 머금은 채 눈처럼 하얗게 반짝인다.
운한각 오른 편엔 '신연'이 놓여 있다. 신연은 크고 화려한 붉은 빛을 띠고 있다. 신연은 국왕의 장례 때 신백을 모시고 가는 연, 즉 가마이다. 신연은 현륭원 재실에 봉안됐던 정조의 어진을 모셔오기 위해 특별히 제작됐다. 지금의 신연은 옛것을 고증해 지난 2008년 새로 제작한 것이다.
운한각을 빠져나오자 너른 마당이 드러난다. '월대'이다. 월대는 보름달이 떴을 때 왕이 달을 보며 달놀이를 하는 장소다. 운한각을 한 바퀴 도는데, 세 곳에서 건물 밑 구덩이가 목격된다. 다름아닌 '아궁이'다. 화령전은 '사당'이다. 위패를 봉안한 뒤 탄신일이나 기일에 제사를 지내던 공간인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따뜻한 사람의 온기가 흐르는 것일까.
어진(임금의 초상화)을 봉안하는 방법에서도 화령전은 서울의 '선원전'과 확연히 다르다. 선원전에서는 어진을 궤에 담아 보관한다. 그러나 화령전에서는 어진을 펴서 모시는 '합자'의 방식을 쓰고 있다. 운한각에는 천장을 화려하게 꾸미는 '보개'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이는 신하들이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았던 정조의 뜻을 따라 건물을 지었기 때문이다.
화령전의 여러 모습을 종합할 때, 선명한 결론이 도출된다. 정조 승하 뒤 신하들이 운한각을 포함한 화령전을 지을 때 권위와 형식을 깨뜨린 공간으로 꾸몄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화령전을 단순한 사당의 개념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의 공간으로 인식했다는 방증이다.
실제, 특별한 날에만 상을 올리는 여느 사당과는 다르게 운한각에는 일주일에 한번씩 식사와 차가 올려졌다. 겨울이면 아궁이에 장작불이 지펴지기도 했다. 종묘에도 화령전 같은 아궁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운한각 서고에는 홍문원, 규장각 등 5대서고에만 보내던 간행물이 '화령전본'이란 이름으로 채워졌다. 월대가 펼쳐진 것은 정조의 자호와 연관이 깊다. 정조는 스스로 자신의 호를 '만천명월주인옹'이라 일컬었다. '밝은 달이 온세상을 골고루 비쳐준다'는 뜻이다. 정조는 보름달이 뜨면 달을 향해 자신의 사랑을 쏘아올렸다. 월대에 서서 보름달을 향해 자신의 사랑을 백성에게 보내며, 그 달빛을 백성들이 받아 내내 평안하라는 기원을 보낸 것이다.
순조는 3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러 화령전을 찾았으며 화성유수도 한 달에 한 번씩 제사를 올렸다.
운한각에 딸린 건물인 '회랑'에 들어선다. 회랑은 건물과 건물을 잇는 복도다. 운한각을 잠깐 보수할 때 정조 어진은 이 길을 통해 옮겨졌다. 비나 눈을 맞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회랑을 지나자 '풍화당' 건물이 드러난다. 풍화당은 재실로, 제향이 있을 때 제를 올리는 사람이 미리 와서 머무는 건물이다. '풍화'는 사회의 풍속과 기강을 교화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순조 역시 아버지를 찾을 때면 이 곳에서 잠을 청하곤 했다.
1903년 지어진 풍화당 위쪽의 화장실은 옛모습이 사라진 채 재건축된 모습이다. 화령전 안의 우물은 제사지낼 때 제수용으로 사용하는 물을 뜨는 '제정'이거나 왕이 마셨던 '어정'일 가능성이 높다고 김준혁(43·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 박사는 말한다.
화령전을 휘휘 돌아 다시 운한각 앞에 선다. 왕의 온기가 차가웠던 몸을 따뜻하게 녹여준다.
/글·사진=김진국기자 blog.itimes.co.kr/freebird




■ 운한각

화령전의 정전

기우제때 부른 시에서 명칭 유래


운한각은 화령전의 정전으로 기품있고 아름다운 건물입니다. 운한은 은하수를 말하는데, 임금이 가뭄을 걱정해서 기우제를 지낼 때 불렸던 시에서 따왔습니다. 순조는 아버지 정조가 나라의 어려움을 돌보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운한각'이라고 이름 짓고 직접 써서 붙였을 것입니다.
운한각을 등지고 서면 왼편에 있는 자리한 풍화당은 화령전에 제사(祭祀)가 있을 때에는 헌관이 머무르는 장소였습니다. 순조가 화령전에 제사를 지내러 올 경우에는 이곳에서 머물며 제사를 친히 주관하였습니다. 이러한 선왕들의 뜻을 이어받아 고종도 화성과 화령전에 자주 찾았습니다. 하지만 화령전이 정조의 어진을 봉안한 사당이 있던 신성한 공간이어서 임금이 직접 머물 경우 화장실이 없어서 너무 불편하였습니다. 그래서 1903년(광무 7)에 운한각 뒤편 풍화당 옆쪽으로 기와지붕을 이은 자그마한 화장실을 지었습니다. 이 화장실은 임금이 쓰던 격조 있는 화장실로 105년째 그 자리를 지키다가 2008년 대대적인 수리를 통해 다시 태어났습니다.
조선왕실의 혼과 얼이 깃든 화령전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재실인 풍화당은 재인청이라고 하여 지역의 예술인들이 모여 재능을 펼치는 곳으로 사용되는 등 본래의 모습을 잃고 훼손되기에 이릅니다. 수원시는 화성행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03년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을 지어 승무 및 살풀이 등의 기능보유자의 활동 공간을 제공함과 동시에 화령전 일대에 대한 정비를 실시하여 전사청 및 제정 등이 복원되었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이 밑바탕이 되어 운한각은 고즈넉한 운치를 지닌 채 오늘날까지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김준혁(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