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몰랐던 화성이야기/ 19 금군을 뛰어넘은 정조친위부대 장용영
수원·평양사람으로 조직…'무예24기' 익혀야 발탁

외영은 화성 수호·정조 현륭원 행차 호위 등 중책



칠흑같은 어둠 속, 서장대가 돌연 불빛을 내뿜는다. 황금갑옷을 입은 정조대왕이 서장대에 오른 것이다.
스스슥. 서장대 앞 연무대 광장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들은 꽃망울이 터지듯 모였다 펴지는가 하면, 열십자로 대열을 이뤘다가 무질서하게 흩어지기도 한다. 암흑 속에서 빛나는 것은 오직 정조와 그를 주시하는 무수한 안광들 뿐이다.
구름이 걷히고, 달빛이 세상을 비춘다. 종마처럼 굵고 갈라진 몸을 가진 사내들이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빛난다. 정조가 천천히 그들을 내려다 본다. 수천 명의 사내들은 일제히 한 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카리스마 짙은 정조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쩌렁쩌렁 울려퍼진다.
"그대들의 임무는 수원을 방어하고 조선을 지키는 것이다. 조선 최고의 군대라는 자부심으로 백성과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 하라!"
수천 명의 목소리가 수원 전역에 울려퍼진다. "전-하! 성은히 망극하옵니다!"
수원은 예로부터 '무'(武)를 숭상하는 도시였다. 서해안 일대로 침입하는 왜구들을 방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심신이 강인한 군사들을 배치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던 셈이다. 이런 도시에서 18세기 최고 부대인 '장용영'이 태동했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장용 외영 이전에도 수원에는 중앙 오군영의 하나인 총융청의 중영이 설치돼 있었다. 정조는 이 총융청의 중영을 그대로 장용 외영으로 전환시켜 새로운 화성 방어 시스템을 구축한다.
정조는 1789년 수원부읍치를 이전하며 '오초'를 우선 주둔시켰다. 여기서 '초'란 부대단위를 말하며 1초는 127명이었다. 정조는 이어 1793년 수원을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25초(3천175명)의 대규모 군대를 배치한다.
군사들은 수원과 평양 사람으로 조직됐다. 수원은 그렇다치고 평양 사람을 군인으로 뽑은 건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평양은 예로부터 압록강을 건너온 여진·거란족 등 왜적을 물리치는 요충지였다. 따라서 '무'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수원에 옛 평양출신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장용영 창설 때 평양사람들이 수원으로 많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주목할 점은 장용영 군대를 상징하는 '무예24기'다. 장용영이 창설되기 전까지 무과에 합격하려면 '무거운 돌 들어올리기'와 같은 기초체력 테스트에만 통과하면 됐다. 그러나 장용영은 달랐다. '무예도보통지'에 나오는 기술과 진법을 익혀야 비로소 장용영 군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이후 조선의 군사들의 군법은 무예24기로 흐르게 된다. 무예24기는 사도세자가 만든 '무예18기'에 '말 탄 채 활쏘기' 등 말을 타고 하는 6개의 무예를 더해 정조가 펴낸 책이다. 이전 군사서적들이 전략·전술 등 이론을 위주로 한 것이었지만 무예도보통지는 전투동작을 그림과 글로 설명한 실전훈련서였다.
장용영은 서울 내영, 화성 외영의 두 개 군영으로 나뉘어 운영됐다. 그러나 화성에 있는 외영이 주인이고 내영이 부속부대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았다. 그만큼 외영이 중요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용인·진위·안산·시흥·과천 등 수원을 둘러싼 화성방어체계에는 무려 1만3천여 명의 군사가 동원됐다. 당시 관료·상인·평민 등 성내에 거주인구가 4천500명임을 볼 때 수원은 막강한 군사도시였던 셈이다.
조선 최고 부대로 화성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았던 장용 외영은 직접적으로 화성성곽·행궁·현륭원을 지켰다. 또 6천 명이 동원되는 정조의 현륭원 행차를 호위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미션은 정조 친위군영으로서의 역할이었다.
왕권강화와 부국강병의 첨병들로 구성된 조선조 최정예부대였던 장용영. 2010년 호랑이의 해에도 장용영은 신풍루 앞에서 이 시대의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산 가득 메아리 치는 포효와 모든 동물을 제압하는 강인함으로.
/글·사진=김진국기자 blog.itimes.co.kr/freebird




■ 화성의 특별 무과시험

무예 출중한 백성 무과응시 자격검증



정조는 화성행차시에 군사훈련을 먼저 실시하지 않고 지역의 무사를 선발하기 위한 무과를 설행하여 군사훈련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를 구축하였다. 정조는 1795년 윤2월 화성으로 행차 한 후 첫날 수원향교의 대성전을 참배하였다. 이는 조선의 국왕이 공자를 참배함으로써 유교를 숭상한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 행차를 마치고 화성행궁으로 돌아와 문무과 과거시험을 개최하였다. 당시 문과는 최지성을 포함하여 5명을 선발하였고 무과는 김관 등 56명을 선발하였다.
정조의 화성행궁에서 개최한 문무과는 지역민들의 사기양양과 동시에 지역의 인재를 선발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은 인재 선발은 화성일대를 지키기 위한 새로운 개념의 도입이었다. 즉 정조는 화성을 지키기 위하여 장용외영 군사들 외에 지역의 백성들이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지금의 민방위와 같은 개념으로 정조의 민관군 합동 군사훈련의 의지를 정약용은 '민보의(民堡議)'를 통해 정리하였다. 정조는 화성의 해안가 일대에 위치하여 서해안의 교통로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지역인 남양과 구포의 백성들 중에서 무예가 있는 사람들에게 '초시'를 보게 한 후 별도의 명단을 작성하여 유엽전 일순(一巡)에 이중(二中) 이상을 맞춘 사람을 합격시켜 다가올 정조의 화성 행차시에 무과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이는 자연스럽게 화성 축성에 참여한 지역 백성들을 위무하는 것임과 동시에 서해안을 통해 접근 할 수 있는 왜구 및 청의 세력을 막아내겠다는 의도이기도 했다.
정조는 이러한 의지로 무과 대상자를 선발하였다. 2월 10일 화성부에서 초시에 응시한 사람은 화성유수부 2천795명, 광주부 1천502명, 과천현 281명, 시흥현 276명이었다. 화성의 특별무과에 응시한 이와 같은 숫자는 이례적으로 많은 숫자였다. 특히 화성유수부 남자들의 상당수가 무과에 응시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정조가 추구하는 화성방어체제 구축에 상당한 기능을 할 수 있었다.

/김준혁(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