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눈
김 선생님! 경인년 새해입니다. 이맘때쯤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송구영신과 더불어 새해 계획을 실천하느라 바쁘겠지만 고등학교의 분위기는 이와는 거리가 먼 듯합니다. 특히나 퇴임을 앞둔 김 선생님의 마음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유년기를 제외하고는 학교 울타리 안에서만 살아온 김 선생님의 감회를 어떻게 말로 이룰 수 있겠습니까? 40여 년, 교육자라는 이름으로 그래도 남다른 자부가 크련만 여전히 참회록을 쓰지 못했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때면 선생님의 슬픈 회한의 그림자가 제 가슴에 남습니다.
김 선생님! 선생님은 학교가 '입시 지옥'이니 '입시 교육의 병폐'라는 비판이 무성했을 때 교직에 발을 들였지요. 초등학교 교육을 정상화 하자고 소위 명문 중학교 간판을 내린 후, 이어 중학교 입학시험을 폐지해 나가던 때이었습니다. 입시가 과열된 대도시 고등학교는 평준화로 입시 교육의 병폐를 막아보자 했습니다.
그 세월의 기억이 생생한 데 요즘 주변의 중학교에서는 특목고에, 고등학교에서는 S대학교에 누구 누가 합격했다는 플래카드가 펄럭이고 있습니다. 학교에 긍지를 높이고 성취 의욕을 북돋자는 것이겠지만 여전히 상급학교 진학이, 그것도 가장 선호하는 학교에 합격시켰다는 성과가 승전보처럼 휘날립니다.
일류대학 합격자 수가 고교의 석차를 가름하는 잣대가 된 지 오래되었고 외고는 일류대학 진학을 위한 관문으로 여기고 있는 현실이 과연 옳은 것인지요.
아이의 꿈이나 적성보다 학원이나 모의고사 문제지, 사설기관 대학 합격 예상 점수표가 진학 정치(定置)가 되었고 가고 싶은 대학에서 무엇을 공부하느냐 보다 대학의 간판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그래서 행여 간판 좋은 대학을 놓칠세라 전쟁 아닌 전쟁에 뛰어 든 어머니의 안타까운 모습은 또 얼마나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인가요?
김 선생님! 선생님은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어 대학 진학을 위한 아이들 성적 올리기에 선생님의 젊음을 올인 했습니다. 전국에 세칭 명문 고등학교에 배움의 기회를 놓친 근로 청소년에게 학교의 긍지를 갖게 하고자 방송통신 고등학교를 부설했고, 선생님은 S고교에서 방송통신고 학생들과 9년을 같이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하고 일찍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사람들에게는 고등학교 졸업은 한(恨)으로 남아 있었던 시절이었는데, 방통고 학생들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이 남달랐습니다. 일반 학생들에게는 대학 진학만이 살 길이라고 다그치면서 방통고 학생들에게 학벌을 강조했고 세상을 살아남기 위해 고교 졸업장만은 있어야 된다고 채찍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김 선생님! 가끔은 흑백 시절을 떠 올리며 이런 백일몽을 꾸어 보곤 합니다.
모든 기업체에 제출하는 이력서에 대학 난을 쓰지 않도록 할 것, 모든 기업체는 학력 불문하고 업무 수행 능력에 따라 임금을 지불할 것, 그래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도록 하고 자기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게 할 것, 선생님은 힘들고 괴로워하는 학생에게 "애야, 나랑 얘기 좀 하자꾸나! 무슨 문제가 있니?"하고 여유 있는 말길을 터주는 학교가 되게 할 것….
김 선생님! 이제 우리 나라도 선진국 같이 세끼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 진정한 삶의 질을, 생의 보람을 가꾸어가게 되지 않았나요? 그야말로 행복은 교과의 성적순이 아니라고 할 수 없나요?
어김없이 새해는 찾아오고 있는데 저도 선생님처럼 참회록을 쓰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 는 시구가 입안을 맴돌고 있을 뿐입니다.

/이덕진 경기효원고등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