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미추홀
한 세기 전, 우리는 '만국(萬國)'의 일원이 되기를 열망하였다. 그러나 퇴짜를 맞았다. 만국평화회의에 간 이준 열사 일행은 문전박대를 당하고 만다. '만국의 꿈'은 운동회에 내 건 '만국기'처럼 펄럭였을 뿐이었다.

그 '만국'과 비슷한 레벨의 단어에 '만인(萬人)'이 있다. 단순히 '많은 사람'이라는 뜻 이외에 '만인'에는 근대적 의미소(意味素)가 들어 있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고 할 때의 '만인'은 곧 '인간 평등'을 뜻한다.

우리는 또 그 '만인'의 한 사람임을 자처해 왔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우리는 '법 앞'에 제대로 서 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최근 외국의 법 앞에서도 아직 그 일원에 끼지 못하고 있는 듯한 사건이 벌어졌다.

서슬이 푸르다는 일본의 판사는 국고 유출을 염려했는지 후생연금 탈퇴 수당을 '99엔'이라 판결했고, 프랑스 판사는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달라니까, '그때는 그랬었다.'는 식의 취지로 약탈을 정당화했다.

E.H. 카가 이런 말을 했다. "힘은 정치에 불가결한 수단이고, 국제정치는 힘을 국제화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힘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 태도이다. 힘이 정의를 만든다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사적 이익집단이라면 또 모르나 적어도 한 국가·사회의 지성이라고 자처하는 동서(東西)의 법관이란 자들이 그처럼 힘에 의한 '국가 이기주의적 판결'을 서슴없이 내렸다는 데 대해 우리는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만국'의 세상에 '만인'들이 더불어 사는 날이 언제 올 것인지 암담해진다.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