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몰랐던 화성이야기 / 18 선암산의 비밀
기본설계땐 선암산까지 축조 계획

산정상서 화성내부 보여 포격위험

기간단축·비용절감위해 변경 추정


동북공심돈에 올라 성곽 밖 동쪽 산을 바라본다. 1번 국도 건너편에 솟은 야트막한 봉우리는 '선암산'이다. 이 산의 정상은 바위로 이뤄졌다. 정상에 걸터앉아 퉁소를 불기 좋다고 해서 '퉁소바위'로 불리는 곳이다.
선암산은 동북공심돈과 정확히 마주보고 있다. 선암산 능선 끝자락에 사람이 서 있다면, 동북공심돈에 선 사람과 눈높이가 정확히 일치할 것 같다.
선암산에 오르기 위해 동북공심돈을 내려와 1번국도 횡단보도를 건넌다. 오른 편에 있는 창룡문에선 지하차도 공사가 한창이다. 선암산 입구에는 '퉁수바위공원 조성 공사'란 푯말이 서 있다. 퉁소바위까지 오르는 길은 나무계단으로 꾸며 놓았다. 계단 꼭대기에서 동북공심돈을 바라본다. 선암산에서 바라본 동북공심돈 역시 눈높이가 똑같다. 구름다리로 연결한다면 바로 잇닿을 수 있는 높이다. 이 곳은 바로 성곽이 이어질 자리였다.
선암산 오솔길을 따라 정상으로 향한다. 5분쯤 걷자 선암산 정상이 드러난다. 정상 앞은 광장으로 꾸며졌다. 정상 위에 8각의 루가 세워져 있다. 퉁소바위의 정확한 위치는 바로 선암산 정상, 바로 8각루가 세워진 곳을 가리킨다. 세운지 얼마 안되서인지 루의 이름이 걸려있지 않다. 8각루 옆의 바위는 잘리고 뜯겨진 모습이다. 화성축성 때 사용한 흔적이다.
1797년, 그러니까 다산 정약용이 곡산부사로 나가기 전이었다. 선암산을 찾은 다산은 탄식하며 오래도록 산을 바라보았다. 애초 화성기본설계도인 성설에서 '선암산성곽'을 주장했던 그였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성곽이 동북공심돈에서 끊어져 있었던 것이다. 성곽은 처음 동북공심돈에서 더 동쪽으로 나아가 선암산까지 이어질 예정이었다. 애초에 계획돼 있지 않았다가 나중에 확장한 '화양루', '용도'와 반대되는 상황인 셈이다. 화양루는 설계 당시 없었다가 생긴 것이고 선암산은 설계 당시 있었다가 없어진 경우인 것이다.
동북공심돈 뒤로 성곽이 들어설 것이라는 사실은 '화성성역의궤' 그 어디에도 들어있지 않다. 그러나 다산이 쓴 화성 기본설계도인 '성설'을 보면 선암산에 초루를 세운다는 계획이 나온다. 성설은 선암산 위로 500m의 옹성을 둘러쳐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다산은 이 곳에 초루를 세워 동북남쪽을 지키는 전투지휘소를 만들 생각이었다. 1795년 혜경궁홍씨 진찬연 당시 만들어진 '화성부성조도'에서도 선암산 성곽이 드러난다. 군사훈련도인 화성부성조도에는 동북공심돈을 둘러친 붉은색 선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이미 완성된 시설물은 검은색으로(묵화이부), 앞으로 만들 시설물은 붉은색으로(홍화미부) 표시하고 있다.
다산이 선암산에 초루에 세우려고 했던 것은 지형적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선암산은 지형이 높은 곳이다. 퉁소바위가 있는 선암산 정상에 닿으면 동북공심돈을 비롯, 화성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만약 적군이 선암산에 올라 동북공심돈 쪽으로 포를 쏜다면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 다산은 이런 지형적 약점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선암산 초루를 설계도에 그려넣었던 것이다. 남한산성을 폭격한 청나라의 홍이포는 사정거리가 4km에 이른다. 이때문에 선암산에서 발포하면 동북공심돈을 지나 연무대는 물론 화성행궁까지 사정권으로 들어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위험이 있는 데도 처음 설계했던 것과 달리 성곽테두리를 동북공심돈까지만 한정한 것은 왜일까. 그것은 공사기간을 단축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화성성역의궤'를 보면 화성의 완공시기를 1796년 10월로 못박고 있다. 결국 공사기간을 맞추기 위해 선암산 성곽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지형이 복잡하고 공사비가 더 들어가야 했던 것도 선암산성곽 포기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대신 설계도에 없었던 화양루와 용도가 지어지기는 했지만.
만약 선암산에 성곽이 둘러쳐졌다면 지금의 1번 국도는 지금의 자리에서 동쪽으로 수백m 뒤에 개설됐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수원의 지형도, 우리 나라 도로지형도 바뀌었을 것이다.
김준혁(43·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 박사는 "화성 축성의 전반적 흐름을 볼 때 선암산까지 반드시 성곽이 연결됐어야 했다"며 "공사시기를 맞추기 위해 설계변경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부끄러운 부분을 얘기하지 않는 것은 올바른 사관적 태도가 아니다"며 "올바른 성곽연구를 위해서는 잘 된 부분은 잘된 대로, 잘못된 부분은 잘못된 대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글·사진=김진국기자 blog.itime.co.kr/freebird



■ 정약용의 홍이포 인식

국방력 좌우한 가공할 포탄

다산, 외침 방어위해 준비 주장


'홍이포'는 네델란드의 대포를 모방해서 만든 명나라의 대포인데 동아시아 역사상 최고의 군사무기로 평가받았다. 홍이포가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된 것은 선조년간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홍이포를 명나라로부터 수입했다는 내용은 전하고 있지 않지만 성호 이익선생의 '성호사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후인 1631년 중국에 선교하러 왔던 이탈리아의 신부 로드리게즈(Rodriges, Joannes)가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에게 홍이포를 선물하여 조선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이익은 홍이포가 무려 80리를 날아갈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대단한 무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 이 기록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후 홍이포를 중요성을 깨닫고 중국으로부터 수입하지 않고 스스로 제작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노력 끝에 홍이포를 마침내 조선에서도 만들고야 말았다. 1731년(영조7년) 9월 21일 훈련도감에서 영조에게 홍이포를 만들었음을 보고하였다. 이때 만든 홍이포의 사거리가 무려 10리이니 요즘의 측정법으로 하면 4km에 해당된다. 당시의 기술로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영조가 홍이포를 만든 기술자들에게 상을 주었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 즉위 후 작성된 만기요람에 의하면 훈련도감에 영조대에 만든 홍이포 2기밖에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마도 청의 간섭으로 무기 제작이 여의치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성호 이익의 학통을 이은 다산 정약용은 군사무기의 제조를 통한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무기가 바로 홍이포였다. 그는 시절이 평화롭다고 군사제도를 소홀히 하면 안된다면서 홍이포 같은 무기가 있는데 어찌 활을 주 방어무기로 하느냐고 개탄을 하였다. 그는 홍이포라는 것은 그 속력이 매우 좋고 파괴력이 대단히 맹렬하여, 전고(前古)의 없는 무기라고 평가하였다. 더불어 그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이를 사용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장차 중국과 일본이 조선을 쳐들어오면 반드시 홍이포를 가지고 와서 공격을 할 것인데 우리는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역설하였다. 결국 이러한 정약용의 홍이포에 대한 인식이 정조에게 적극적으로 수용이 되었고, 최고의 성곽이었던 화성에 은밀히 배치하고자 했을 것이다.
/김준혁(수원화성박물관학예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