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는 주인공이 없다
먼저 금년 한해는 모든 사람이 편했으면 좋겠다.

석유자원을 배경으로 강성해진 중동에서 다가올 자원의 한계를 절감하고 한국의 원전설치 운영기술을 배우기 위해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정부가 47조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세계로 알려졌다.
중동이 석유자원의 고갈을 미리 대비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 원전을 건설하는 것이나 북극의 만년설이 녹아내려 북극곰이 설 땅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정부재정이 확대되는 만큼 부채도 함께 늘어나고 수출이 잘 되어 기업경쟁력은 강해져도 합리적인 구조조정이라는 미명 아래 직장을 잃는 사람들은 늘어만 간다. 이것은 어느 국가, 특정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촌 전체가 짊어지고 있는 인류의 모순이다.

잘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것은 선진국의 경제규모, 군사력, 국민소득 수준에 이르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고유한 우리역사, 글, 말, 풍속, 예절, 교육, 경제, 복지 등을 지키고 닦아서 우리만의 색채(色彩)와 상징(象徵)을 창조해 세계와 무리없이 소통하고 다함께 잘사는 길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진하는 길이다.

위정자들은 수치와 통계만 높은 목표를 내걸어 시민의 일상을 피곤하고 어렵게 만들 것이 아니라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에도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 큰돈 들지 않아도 보람 있고, 최소한의 여유라도 누릴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최선을 다하는 정책이고, 지도자의 의무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시민이 항상 깨어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일상의 생활 너머 이면에서 벌어지는 일, 세계적인 흐름을 언제나 느끼고 자각하며 산다는 것은 보통 힘들고 어렵고, 피곤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와 고전에 의존해 그 속에서 길을 찾는다. 그러나 우리가 고전이나 왜곡된 역사를 반성없이 그대로 수용한다면 백이 흑이 되고 배가 산으로 가도 판단이 바로서지 않아 일을 그르치게 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 유래한 초선차전(草船借箭)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적벽대전에서 오나라 대장군 주유(周瑜)의 무리한 명을 받든 제갈량은 목선 20척을 짚으로 위장하여 새벽의 짙은 안개 속에서 조조군을 향해 진격하는 척 했다. 조조의 병사들은 함정이 있는 줄 착각하고 활로 대적했는데 배의 양 편으로 10만여개의 화살이 꽂혔다. 제갈량이 주유와의 힘든 약속을 기지로 화답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를 보면 이때 화살을 빌린 사람은 제갈량이 아니라 오나라의 손권이며 적벽대전의 주동자 역시 주유라고 되어 있다.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도 역시 주유가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물리쳤다고 읊고 있다.

지금의 호북성 양번시 융중에 칩거하고 있던 제갈량을 유비형제가 찾아가는데 제갈량이 두번은 문전박대하고, 세번 만에 정중하게 맞았다는 것이 삼고초려의 내용이다. 제갈량이 직접 저술해 고전이 된 '출사표(出師表)'에는 "선황제(유비)께서는 신의 비천함을 아랑곳하지 않고 지체를 낮추면서 세 번이나 저를 찾아오셔서 당대의 일을 신에게 자문했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일 대목은 삼고초려보다 "당대의 일을 신에게 자문했다"는 것이다.

이때 제갈량의 나이 26세, 유비는 46세였다. 한사람은 청년이고, 또 한사람은 장년이다. 삼고초려에서 세번의 방문은 서로의 인물됨과 능력을 탐색하는 과정이었다. 어째서 유비만 찾아가고, 제갈량은 자기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유비 진영을 찾아가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자문이란 서로 토론과정에서 얻어내는 결과가 아닌가! '위략(魏略)'이나 '구주춘추(九州春秋)'를 살펴보면 연전연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우는 유비의 용기에 탄복한 제갈량이 번성(樊城)에 주둔하고 있던 유비를 찾아가 천하삼분대책을 내놓아 서로 의기투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삼고초려가 주는 교훈은 무릇 위정자란 초야에 묻힌 현인(지식인)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며 천하를 경영하기 위해 인재를 얻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교훈과 별개로 역사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객관적 사실에 접근해야 한다. 그것이 타인의 입장을 최대한 이해하고 서로 조화롭게 살아가는 기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를 해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위치에서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역사의 무대에는 별도의 주인공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서경(書經)'에 "하늘은 친한 사람이 없고 오로지 덕(德)이 있는 사람을 돕는다"는 말이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역사를 거울삼아 사회에 참여하는 것보다 더 큰 보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훗날 덜 부끄러운 세대가 되는 길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