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훤하게 트인 길 양옆조용한 상점 연이어
훤하게 트인 길 양옆조용한 상점 연이어
  • 승인 2009.07.15 00:00
  • 수정 2009.07.14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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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의 중국기행 / 휘주(徽州)와 삼청산(三淸山) 3
상당수 간판 '휘주 휘상' 넣어 작명 … 역사·전통 스며

삼나무·대나무 가구 특산품 전시 … 기홍·둔록茶 유명



▲휘주상가(徽州商街)
사람들은 이곳을 명·청대 옛 거리라고 소개하지만 주위 환경과 역사를 보면 휘주 상가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훤하게 트인 넓은 길 양 옆으로 이삼층 건물이 연이어 들어서 있다. 한국의 상가는 길이 좁고 오밀조밀해서 사람들과 상인들의 말소리가 서로 섞여들어 시끄럽지만 이곳의 상가들은 폭이 넓고 소리치는 사람이 없어 비교적 조용하다. 거리에 걸려있는 간판에는 '휘주, 휘상'이라는 이름을 넣어 작명한 것이 눈에 많이 띈다. 이 지역의 역사와 전통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상점에는 가구, 차, 먹, 붓, 종이, 벼루, 칠기 등이 주로 보인다.
삼나무와 대나무가 많은 곳이니 가구류가 특산품이 되고 기후가 습윤하고 고산준령이 많고 안개가 짙어 차의 성장이 매우 유리하기 때문에 차 재배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기홍(祁紅)차와 둔록(屯綠)차는 중국에서도 유명하다. 또 이 지역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많아 송연(松煙)으로 만든 휘묵(徽墨)이 유명해서 황실에까지 진상품이 되었던 대표적인 토산품이다.
이 지역 사람들이 자부심의 표상으로 생각하는 휘주와 휘상에 대해 알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이곳을 찾은 이유가 반감하리라. 휘주는 앞에서 굉촌을 이야기할 때 설명했으니 이제는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은 휘상(徽商)에 대해 더듬어 보자.
명나라에 이어 청나라 후반까지 상업발전과 물품교류를 위해 상방(商幇)이라는 상인조직이 형성되었다. 상방의 활동은 매우 적극적으로 전개되어 중국 전역은 물론 동남아시아와 한국에까지 뻗쳐 상권에 진입했다. 상방은 지역을 중심으로 혈연과 지연으로 얽혀 상부상조하며 회관을 짓고 이를 중심으로 다시 연락망을 굳혀 이익을 창출하는 상인 집단이다. 종교와 교육을 중심으로 상부상조하며 이익을 도모하는 유대인 정보망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시나고그(synagogue)와 비슷하다. 상방의 출현은 중국 고대상업의 발전을 선도했고, 전통적인 경제구조의 변화를 촉진했으며 전국 각지에 그 지역을 대표하는 독특한 상방문화를 조성했다.
상방의 형성과 발전은 지역성을 바탕으로 한다. 각 지역마다 그 지방에 유리하게 조성된 상업집단이 있다. 규모가 비교적 큰 상방으로는 산동(山東), 산서(山西), 섬서(陝西), 동정(洞庭), 강우(江右), 영파(寧波), 용유(龍遊), 복건(福建), 광동(廣東), 휘주 상방 등이 이른바 10대 상방이다. 규모가 작은 상방은 이보다 훨씬 많은데 세력의 범위와 영향력으로 볼 때, 서북쪽에 있는 산서상방을 뜻하는 진상(晋商)과 휘상이 단연 최고였다. 휘상의 정신을 요약하면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신용으로 물건을 거래하며 의리로 이익을 삼고 어진 마음을 가장 기본적인 자질로 삼는다.
또 휘상의 경영방식은 종족의 세력을 바탕으로 상권을 경쟁하여 독점하였으며 동향 및 친족으로 구성된 많은 직원들을 조직통제하기 위해서는 종법(宗法)을 사용하여 충성심을 유도했다. 그리고 황실과의 통로를 언제나 열어 놓았다. 명·청 시기에는 국가의 상업억제 정책과 전매정책으로 인해 상업의 발전이 어려워 관부(官府)와 결탁할 필요가 있었다. 휘상이 활동하는 지역에도 명문 귀족의 자제들 가운데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권부에 들어선 사람이 있는데 이들은 휘상이 필요로 하는 정책적 지원을 제공하는 통로가 되었고 동시에 상인들은 관료를 위한 반대급부를 항시 준비했으리라.
상인들은 관료에게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 집안에서 인물이 나오도록 피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휘주의 무원(源)은 신유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 1130-1200)의 본적이기 때문에 학문에 대한 열기가 대단하다. 물론 자신들의 필요에 의한 것이지만 "조그마한 마을에서도 공부하고 일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十戶之村不廢耕讀)" "가장 즐거운 일은 오로지 공부뿐이다(第一等好事只是讀書)"라는 글귀가 기둥 대련에 걸려 있다. 굉촌만 하더라도 남호서원(南湖書院), 자양서원(紫陽書院), 죽산서원(竹山書院) 등이 유명하다.
명나라 때 휘주 인구는 56만여 명으로 당시 52개의 서원과 462개의 학당, 사숙이 있었다고 하니 학문에 대한 열기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가히 알만하다. 중국이나 대만, 홍콩에 가면 재신(財神)으로 관우(關羽)를 모신다. 이것은 진상들의 관습에서 온 것이다. 진상은 관우를 섬기고 모든 진상회관에서 관우를 의(義)와 이(利)가 상통하는 인물로 떠받들며 그가 군막에서 전쟁을 지휘하던 것처럼 경영에서도 대권을 장악한다고 믿고 있다.
한 편 휘상들은 관우 대신 주희(朱熹)를 모신다. 돈을 벌고 지키기 위해서는 권력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체험에서 오는 절규인지도 모른다. 하병체(河炳)의 연구에 따르면 1731년에서 1804년까지 이 지역에서 배출된 진사가 106명에 달했다니 놀랄 만하다. 휘상들은 부자가 된 뒤에 자신들의 고향에 돌아와 문화적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활동했던 그 지역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고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근검절약을 신조로 삼았던 진상과는 이 점에서 확연한 대비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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