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의 영화이야기
수업 차 전주대를 찾는 매주 화요일 저녁, 전북독립영화협회 사무실에서 영화 특강을 하고 있다. 그 대상은 주로 전북영화비평포럼 멤버들인데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 대개 40~50대이며, 현직 교사들이 과반이다. 이른바 '서드 에이지'(제3연령기)에 속하고 그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모임 열기만은 대학이나 대학원에서의 그 어떤 강의 못잖다. 아니, 그 이상으로 뜨겁다. 영화를 보고 듣고 읽는 솜씨도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다. 어지간한 영화 평론가 수준 뺨친다. 총 10 차례 중 3번째인 이번 주 화요일 비평 특강에서도, 그 진가가 빛을 발했다.

글쓰기 과제로 한 멤버가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스티븐 달드리 감독)에 대해 문학 소녀적 감성 물씬 풍기는 감상평을 써왔는데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글은 "충분히 가슴 두근거리며, 공감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15세 소년과 중년 여인의 사랑으로 출발해 모성으로 나아가더니, 끝내는 질문을 던진다. "감독은 그녀, 케이트 윈슬렛이 뒷모습으로 더 많은 말을 하는 배우라는 걸, 옷을 입었을 때보다는 벗었을 때 더 빛이 나는 배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 그러더니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영화가 거의 기대고 있는 그녀와 상대 배우의 섬세한 표정 연기와 화면의 톤도 훌륭하지만 영화 보는 내내 가슴을 뛰게 만든 건, 그녀의 뒷모습이다. 아름답고, 가슴 아픈"이라고.

사실 난 영화를 두 번 보면서도 케이트/한나의 뒷모습에 별 다른 눈길을 주질 않았다. 미니 홈피에서도 피력했듯, 케이트는 지금껏 보여준 적이 없었던, 지극히 섬세한 연기를 선보이며 그 섬세함에 전율이 일어날 정도지만, 정작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선 것은 그 주제 내지 문제의식이었다. 사랑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관계 등과 연관된 것. 그래 난 이렇게 물었다. 가령 강호순처럼 천인공노할 연쇄살인범이 있다. 그에게도 당연히 개인적 사연이 있고 아름다운 사랑이 존재할 수 있다. 그 경우, 그의 사랑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그 뒷모습이라……. 마치 한방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명색이 프로 평론가로서 아마추어에게 한 수 톡톡히 배웠다고 할까.
 
문득 밀려드는 생각. 케이트가 이 평을 접한다면 앞으로 더 이상은 노출 연기를 하지 않겠다는 식의, 실망스러운 결심을 공표하거나 그러진 않을 텐데. 혹 그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면 그 상처도 적잖이 치유 받을 수도 있을 테고.

또 다른 멤버는 말했다. 한나가 감옥에서, 중년이 된 주인공 마이클(랄프 파인즈)으로부터 책을 읽어 녹음해준 테이프들을 받을 때, 그 때마다 그녀의 표정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보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그런 연기는 케이트가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그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기 충분하다고.

그 얼마나 섬세하고 멋진 영화 보기들인가. 영화에 담기기 마련인 그 많은 매혹들(attractions) 따위엔 아무런 관심 없다는 듯, 시종 내러티브 분석이나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읽어내기 급급한 이 땅의 적잖은 영화 평론가들의 진부할 대로 진부한 관점과는 판이하게 다른, 신선한 시선! 영화 보기의 오묘한 맛을 새삼 절감한 시간이었다. 그들이 내 선생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 지면을 빌어 그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