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의 영화 이야기
줄리엣 비노쉬는 주지다하다시피 1980년대 프랑스 영화계가 배출한 세계적 여배우다. 그녀는 이자벨 위페르, 이자벨 아자니 등과 더불어 지난 이십 수년 간 프랑스 영화를 지탱시켜왔으며, 자국 국민들로부터 끊임없는 사랑을 받아온 대표적 '포스트-카테린 드뇌브'이기도 하다. 그 잘난 프랑스인들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면 이름 앞에 정관사 'la'를 붙여 "라 비노쉬"라는 애칭으로 부르겠는가.

그 비노쉬가 방한 중이다. 올리비에 아싸야스 감독의 신작 <여름의 조각들> 홍보 및, 오는 19일부터 3일 간 LG아트센터에서 펼쳐지는 모던 댄스 <내 안에(in-i)> 공연-1년여 전부터 모든 영화 스케줄을 뒤로 미루고 리허설에 매진해 왔단다-등을 위해서다.

17일(화) 오후 서울 하이퍼텍 나다에서 열린 매체 시사회와, 뒤이어 열린 짧은 Q&A에서 바라본 그녀는 진정 매혹적이며 아름다웠다.

40대 후반이라는 연륜이 안겨준 원숙함 덕일까, 무척이나 당당하면서도 지극히 겸손했다. 우문현답으로 이어진 그 자리에서 그녀는 답했다. 영화를 넘어 미술, 무용 등에 이르는 '탈-장르적' 시도를 멈추지 않는 까닭은 그런 시도들이 자신을 겸손하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겸손'이라...서구인의, 그것도 소위 월드 스타의 입에서 들으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한 낱말이었기에 그 어떤 미사여구들보다도 인상적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물론 현재진행형의 대배우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에 대한 일련의 추억들이 물밀듯 밀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 네 인간은 추억을 자양분 삼아 사는 존재들이니까. 라 비노쉬 그녀는, 국적을 불문하고 1980년대 후반부터 10년 가까이 이 땅의 씨네필들이 가장 사랑한 여배우 중 한명이었다. 그 결정적 계기는, 한때 '포스트-(장 뤽) 고다르'라고 불려지기도 했던 레오스 카락스감독의 '나쁜 피'(1986). 이른바 '누벨 이마주 열풍'이 한국 씨네필들의 몸과 마음을 휩쓸던 당시, 그 포스트모던적 멜로 SF는 가히 열광의 으뜸 대상이었다. 열광은 숭배, 즉 컬트로까지 나아가며, 씨네필들로부터 역대 최고 영화로 뽑히는 파란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했다. 다분히 맹목적인 해프닝이었지만, 실제로 그랬다. 하긴 김홍준 감독 같은 전문가마저도 구회영이란 필명으로 91년 출간한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가지 것들>에서 '80년대 세계영화 100선' 중 3위에 올렸을 정도니 오죽했겠는가.

레오스 카락스, 드니 라방과 함께 비노쉬에게 향했던 씨네필들의 열렬한 애정은 1992년 4월 <퐁네프의 연인들>이 선보이면서 진정 국면에 접어든다. 영화에 대한 기대가 워낙 커서이기도 했으나, 카락스에 대한 그 간의 평가가 과장임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또 한차례의 실망을 안겨준 <폴라 X>(1999)나, 봉준호, 미셸 공드리와 공동 작업한 삼부작 <도쿄!>(2008) 등을 통해 잠시 화제의 인물로 떠오르기도 했으나 그는 더 이상 '포스트-고다르'가 아니었다. 잊혀진 존재나 다름 없었다. 라방 역시 크게 다를 바 없었고.

그러나 비노쉬는 달랐다. 그 이후로도 루이 말 감독의 <데미지>(1992),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세가지 색 : 블루>(1993),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등을 안겨준,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잉글리쉬 페이션트>(1996), 그리고 라세 할스트롬의 <초콜릿>(2000) 등에서 여전히 그 존재감을 발산, 유지시킨다. 다소 그 강도는 감소되긴 하나, 그 외연은 외려 씨네필에서 대중관객에게로 이동, 확대시키면서.

그녀의 말처럼, 비노쉬 그녀는 황금기 내지 다이아몬드기를 일찌감치 지난, 어쩌면 은퇴기에 접어든 배우일 지도 모른다.

그녀의 활동 영역 확장도 그 증거로 비쳐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말한다, 자신있게. '열정'에선 예나 지금이나 별반 변한 게 없다고. 그 얼마나 아름다운 당당함인가. 그 열정, 자신감, 겸손에 진심 어린 갈채를 보낸다.
 
/부산국제영화제 '월드 영화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