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의 영화이야기
연일 '작은 기적'을 빚어내고 있는 다큐멘터리 <워낭소리>의 흥행 요인 등을 묻는 질문을, 며칠 전 한 기자로부터 받았다. 떠오르는 대로 이러저런 답변을 하긴 했지만, 그것을 몇 가지로 요약해 말하기란 쉽지 않다. 워낙 복합적인 변수들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어서다.

그 변수를 편의 상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측면으로 양분해보면, 나는 후자 쪽에 방점을 찍는 부류다. 사실 나는 '워낭소리'의 영화적 수준에 적잖이 실망한 편이다. 소문과는 달리, 여느 수작 다큐멘터리들과 비교해 그 미학적 수준이 뛰어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니, 서툴기조차 했다. 다소 습관적으로 멈춰 서서 카메라가 자연 풍광이나 소리를 보여주고 들려줄 때는 만든 이들이 의도치는 않았을 어떤 작위성마저 느껴져 거북살스러웠다. 헌데 그 서툴음과 작위성이 제재의 투박함·소박함 등과 맞물리며 기대 이상의, 묘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 아닌가. 그 결과, 그 어떤 감동적 픽션 영화를 능가하는, 잔잔한 재미와 감동을 듬뿍 안겨주는 것 아닌가.

영화를 찍으며 여든 고개를 넘는 주인공 할아버지와,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다 저 세상으로 가는 소의 표정을 별 다른 수식 없이 포착·응시하는 카메라/감독(이충렬)의 시선이 무엇보다 인상적이다. 지나치게 반복적이지 않나 싶어 때론 짜증(?)스럽기도 하지만, 신세타령을 입에 달고 있으면서도 내심으론 무심하기만한 남편과, 그 남편의 '얄미운 연인' 늙은 소를 그 누구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했던 할머니의 실감 연기도 시쳇말로 짱이다. <집으로...>(이정향)의 김을분 할머니에 버금갈 정도로.

결국 영화의 기념비적 '삼각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일말의 감동과 위안이 필요한 이 땅의 적잖은 관객들의 마음과 몸을 강력히 포획한 셈이다. 심지어는 대통령의 몸까지도……

크고 작은 텍스트의 미덕에 가려 간과해서는 안 될 요인들은 하지만 미션 임파서블을 미션 파서블로 변화시킨 일련의 하드웨어적 시도들이다. 영화를 완성해내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을 감독의 노고에 대해선 새삼 강조하진 않으련다.

이렇듯 큰돈을 벌어들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채 그저 그들의 질긴 삶과 죽음을 담고자, 다큐멘터리로서는 결코 작지 않은 1억 원이라는 순제작비를 쾌척했을 이들의 모험에 진심어린 갈채를 보낸다. 그 모험을 그저 소중한 시도에 머물게 하지 않고 현실 속 기적으로 비상시키는데 기여한 이들의 또 다른 모험적 시도에도 찬사를 보낸다.

가장 큰 찬사는 그러나 관객의 몫일 터. 그들이 아니라면 어찌, 어지간히 센 영화가 아니면 좀처럼 그 두터운 문을 열어주지 않는, 이른바 다양성 영화 내지 비상업 영화에는 인색하기 만한 영화관들의 대문을 활짝 열게 할 수 있었겠는가.

지나치게 상투적이라 핀잔을 주저 하는 수 없다. '워낭소리'가 새삼 확인시켜준 귀중한 교훈은 다름 아닌 그 관객의 힘이다. 그 힘으로 영화는 머지않아 100만 고지마저 넘을 기세다. 그 힘이 과연 어디까지 뻗쳐나갈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