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10일 (일, 제15일)

오늘 아침기온은 어제보다 더 내려가서 14℃이다. 오늘은 와메나를 떠나 경비행기를 타고 자야푸라로 돌아가는 날이다. 와메나를 이륙하고 40분 만에 다시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5월, 연합군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내렸던 자야푸라 공항에 착륙했다.
자야푸라는 뉴기니 섬 북쪽해안에 있는 항구도시이다. 바다에 다가서고 있는 산, 만에 있는 작은 섬들, 뒤쪽에 있는 센타니(Sentani) 호수가 아름답고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센타니 호수를 떠나 자야푸라 박물관에 들렸다가 오늘은 일찍(16:50) 호텔로 돌아왔다.


2008년 8월 11일 (월, 제16일)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오늘은 뉴기니 섬의 자야푸라를 떠나 술라웨시 섬의 '따나 또라자'(Tana Toraja)로 가는 날이다. 오전 8시 10분, 자야푸라를 이륙하고 50분 후 기착지인 뉴기니 섬 서북쪽에 있는 비아크(Biak) 섬에 착륙했다. 왜 하필이면 가까운 이 작은 섬에 내렸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귀국 후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뉴기니 섬의 서북부에 있는 비아크 섬은 동서 약90Km, 남북 약40Km의 작은 섬이지만 산호초와 열대어로 유명한 곳이다. 이 섬은 남위 1도의 적도 바로아래에 있으며 섬 전체가 열대우림으로 덮여 있다. 지금 비아크 섬은 자카르타와 미국을 연결하는 국제선 항공기가 경유하는 국제공항이다.

오스트레일리아군의 포위망이 점차 조여들고 1945年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했다는 소식이 이곳에도 전해졌다. 일본군은 오스트레일리아군에게 항복하고 무장해제 당한 후 뭇슈 섬에 수용되었다. 제18군「맹(猛)」집단 - 사령관 아다찌 하다조우 (安達二十三) 중장은 자신이 차고 있던 군도(軍刀)를 오스트레일리아군 사령관에게 바치고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수용된 일본군은 11,197명이었으며 1946년 1월말까지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날을 기다리면서 1148명이 쇠약하여 숨을 거두었다.

비아크 섬에서 45분간 체류한 다음 이륙했다. 술라웨시 섬의 마카사르 신공항에는 2시간 30분 만에 도착했다. 이곳은 시차가 1시간 있다.
마카사르 신공항은 1주일 전에 개항했다고 한다. 이제 '따나 또라자'(Tanah Toraja)로 가는 고행의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덴파사르 공항에서 또라자까지 약 330km이나 버스로 험한 길을 10시간 가까이 가야한다. '따나 또라자'는 망자(죽은 사람)와 더불어 사는 땅이라고도 하고, 평생을 준비하는 산 사람(죽은 사람 아닌)을 위한 장례식을 치루는 풍습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이곳 사람들은 '똥꼬난'이란 배처럼 생긴 선형가옥(船形家屋)에 살고 있다. 길은 왕복2차선의 포장도로 이지만 파인 곳이 많고 느린 차가 앞을 막아도 추월하지 못하고 가야했다. 우리들은 낙지처럼 생긴 술라웨시 섬의 한가운데를 왼쪽에 마카사르 해협을 보면서 북쪽을 향해 느리게 올라가고 있다.
2시간 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나타났다. 결혼식이다. 우리들은 신나게 신랑신부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이 결혼식은 이슬람교도의 결혼식이었으며 남자화객들은 여자의 치마 같은 색색의 전통의상에다 양복상의를 입은 것이 우리들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어린 신부의 의상은 놀라울 정도로 화려하다.
5시간 가까이 달려 큰 도시 빠레빠레에 도착했으나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출발해서 8시간이 지난 오후 8시에 또라자 지방 입구의 문을 지나갔다. 오후 9시 10분 드디어 또라자의 중심지 란떼빠오(Rantepao)의 Heritage Hotel(해발800m)에 도착했다.
마카사르 공항을 떠나고 9시간, 오늘아침 뉴기니 섬의 자야푸라를 떠나고 무려 14시간 45분만이다. 이곳 호텔은 모두 선박과 같은 선형가옥(船形家屋)이 20동(棟)정도 정연하게 서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비아크 섬

비아크 섬은 비행기 때문에 발전한 섬이다. 지형은 석회암질로 넓고 평탄한 비행장을 건설하기에 적합하고 일본군으로서는 필리핀에서 동부 뉴기니의 최전선에 이르는 비행경로에 있고, 연합군으로서는 파라오 섬과 필리핀 남부까지를 폭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요충지였다. 파라오 섬은 술라웨시 섬과 '괌 섬'의 중간지점에 있는 섬이다. 일본군은 비아크 섬에 비행장을 건설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때 이 비행장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것은 연합군이다. 연합군은 비아크 섬이 전략상 중요지점이기에 1944년 5월 27일,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8월 20일, 이 섬을 점령하고 비행장을 확보했다. 86일간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1만 명 이상이 전사했으며, 생존자는 불과 12명이었다.
뉴기니 전선 전체전황을 보면, 일본 제18군은 정글로 후퇴하고 원주민의 협력을 얻어 식량을 채취하면서 자활생활을 했다. 풀뿌리, 도마뱀, 곤충 등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점차 굶주림과 열대성 감염증으로 쓰러져 갔다. 일본군 병사가 동료병사를 습격하여 먹은 인육식사건(人肉食事件)이 발생한 것도 이때이다. 1944년 12월, 일본 제18군은「우군병사의 시체를 먹는 것을 엄벌한다,」라는 포고령을 발령했으나 우군병사의 인육을 먹은 4명이 처형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운 좋게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온 일본군병사의 회고록을 오래 전에 읽은 일이 있다. 그도 굶주림에 못 이겨 전우의 시체를 먹었다고 회고록에서 고백하였다. 인육을 엷게 떠서 적도 아래의 뜨거운 바위에 올려놓으면 바짝 마른 육포가 된다고 했다. 인육을 먹은 경험이 있는 병사가 죽을 때가 되면 동료병사들에게 <나를 먹지마...>하면서 애원했다고, 그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