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의 영화이야기
스페인 영화는 대다수 한국 영화 팬들에겐 지금도 여전히 낯선 그 무엇이다. 그 동안 워낙 소규모로 선보여온 데다, 여타 유럽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대개는 소위 '예술 영화'라는 포장으로 소개되어온 탓이다.

그 단적인 예가 현대 스페인 영화의 대명사라 할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들이다.

1980년대 후반, 문제적 걸작 <마타도르>(1986)가 국내 첫 선을 보인 이래 최근작 <귀향>(2006)에 이르기까지 10여 편의 영화들이 선보여 왔으나 예외 없이 그 범주 아래서였다. 국내외적으로 그를 스타덤에 등극시킨 결정적 출세작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1988)가 당시 자국 영화사상 최고의 박스 오피스를 기록했건만 말이다.

그런 아이러니컬한 수용은 물론 알모도바르나, 그 나라 영화들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일부 할리우드 및 한국산 대작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세상의 영화들이 그렇게 선보이는 것이 관행이요 현실이다. '작은 영화' 내지 '다양성 영화'라는 우산을 쓰고.

우리 영화들 역시 별 반 다를 게 없다. <괴물>이나 <태극기 휘날리며> 등 한국산 대작들이 미국 및 유럽 국가들에서는 예술 영화로서 소개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온갖 다양한 나라, 다양한 작가, 다양한 영화들을 일반 관객들에게 소개하고 권하고 싶어 안달인 영화 전문가의 바람은 그렇기에 애당초 실현 불가능한 과욕이요 허망한 소망이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전문가로서 평론가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다양한 영화들을 적극 추천해 한 사람이라도 더 보게 하는 것 아닐까. 적어도 내겐 그렇다.
 
빚어진지 10여 년 만에 이 땅에서 빛을 보게 된 <북극의 연인들>(1998)도 그 중 하나다. <오픈 유어 아이즈>(1997) <디 아더스>(2001) <씨 인사이드>(2004) 등의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와 더불어 2000년 대 스페인 영화를 대표하고 있는 '포스트-알모도바르', 훌리오 메뎀의 출세작이다.

훌리오 메뎀 감독은 <섹스와 루시아>(2001)를 통해 국내에서도 적잖은 열혈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국내 모 평자의 말마따나, 영화는 "가슴 시린 사랑과 사람 사이의 교감, 운명에 관한 탁월한 성찰"이다. 초등학교 적 시작되어 10대 사춘기를 거쳐 성년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말 그대로 가슴이 아릴 정도로 치명적이면서도 감동적인 러브 스토리!

이 자리에서 강조하고픈 한 가지가 있다. 스페인 영화에서는 '우연'이 결정적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우연이 남발한다고 투덜대는 것은 따라서 스페인 영화의 어떤 경향에 대한 무지 내지 오해를 드러내는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 <북극의 연인들> 또한 그 경향을 절절히 증거 하는 작품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1994) 이후 유행처럼 구사되곤 하는 순환적·반복적·에피소드적인 플롯이 숨 가쁘리만치 유려한 리듬을 타고 펼쳐진다. 그렇다고 플롯을 위한 플롯에 머물진 않는다. 세월의 한계를 넘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사랑이라는 제재와 완벽하게 조응한다.

특히 다양성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필견을 강추하고 싶은 아름다운 소품이다. 한 동안 그 아린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할 성 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