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광 동양?소고문의 물의대지 인조네시아 기행기
 
2008년 7월 30일 (수, 제4일)

어제 밤 묵은 시피록 마을은 해발950m의 산속에 있으므로 아침기온은 14℃로 낮다. 오늘도 계속 남동쪽으로 300Km 내려가서 '부낏띵기'까지 가려고 한다. 300Km는 얼마 안 되는 거리지만 험한 산길이어서 한 시간에 겨우 20~25Km정도밖에 갈 수 없다. 오늘은 도중에서 적도를 넘게 된다.

가는 길의 양쪽에는 나무가 많다. '팜 나무'도 보고 고무나무도 보면서 지나간다. 높은 팜 나무에는 구슬 같은 열매가 긴 포도송이처럼 수 없이 매달려 있다. 이 열매에서 '팜 오일'을 짠다. 팜 오일은 팔미틴산의 글리세리드가 주성분이며 식용유, 비누, 마가린 같은 유지공업에 널리 쓰인다. 또한 최근에는 바이오 디젤오일의 제조에 쓰이기기도 한다. 고무나무도 높이 30m이상 되는 큰 나무이며 나무껍질을 칼로 긁어 나무에서 분비되는 라텍스(latex)라는 고무유액(乳液)을 채취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식물에서는 과일과 향신료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공업용 원료도 얻고 있다. 작은 폭포가 있는 곳에서 한참 쉬었다. 운전기
사가 혼자서 장시간 험한 길을 운전하기에 가끔 쉬기도 해야 한다.

향료나무를 재배하고 있는 향료림(香料林)에 들렸다. 여러 가지 향료가 식물에서 채취되고 있다. 바닐라, 시나몬, 후추 그리고 설명은 들었으나 이름은 금방 잊어버린 그 많은 향료가 이런 곳에서 채취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산림은 자연의 보고이다. 그러나 이 풍부한 향신료 때문에 옛날에 서양 사람들의 침략이 시작되었으며 무려 350년이란 긴 세월을 네덜란드에게 지배당했다.

향료림을 떠나고 한참 가니 길가에서 사람들이 검은 덩어리를 뒤집고 있다. 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으려고 다가서니 코를 찌르는 악취로 혼났다. 그들은 생고무덩어리를 건조시키기 위해 뒤집고 있었다. 고무나무에서 채취된 라텍스 유액을 초산(醋酸)으로 굳혀서 판(생고무)으로 만들고 둘둘 말아서 다루기 쉬운 크기의 덩어리(30cm?30cm?30cm)로 만든 것이다.

점차 고도가 낮아져 점심식사를 할 무렵에는 해발550m까지 내려왔다. 이 지역은 세계에서 보기 드문 모계사회인 미낭카바우(Minangkabau) 문화의 중심지이다.『자연이야말로 최대의 스승이다』라는 것이 이들의 철학이다. 어떠한 동물도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서 길러진다는 이 세상의 사실에서 모계사회를 지금도 지키고 있다. 미낭카바우족(族)은 모계공동체사회를 이루고 있으며·이 모계사회에서는 자식과 재산은 어머니의 것이다.
 
재산이란 돈뿐만 아니고 미낭카바우족에게 중요한 토지, 가축, 집 등도 포함된다. 어머니가 죽은 후에 제산은 딸들에게만 분배된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남자에게는 기본적으로 재산소유권이 없다는 것이 미낭카바우족의 전통이다. 미낭카바우족의 결혼은 남자가 데릴사위로 신부 집으로 들어간다. 결혼할 때는 신부 집에서 신랑 집에 신랑에게 어울리는 돈을 지불하는 습관도 있다,

지금은 결혼한 남녀가 부모와 헤어져 자기들만의 새집으로 이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남자가 처갓집에 사는 경우가 많다. 옛날에는 남자가 밤에만 여자 집으로 가는 처문혼(妻問婚)도 있었다고 한다. '처문혼'을 초서혼(招?婚)이라고도 한다. 모계사회인 미낭카바우 사회에서는 남성은 불상한 존재이며, 실제로 바람이 불면 순식간에 날라버리는 신세이다. 그러나 남자에게 전혀 권한이 없는 것은 아니며 가족이나 친족사이에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는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미낭카바우 사회에서는 여성이 경제를 남성은 정치를 각각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오후 3시 20분, 본졸(Bonjol) 마을에 도착하여 적도를 걸어 넘었다. 비행기로 적도를 넘은 것은 20여회 되나 오늘같이 걸어서 넘는 것은 처음이다. 적도는 지구의 북극과 남극의 극점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고 지구의 자전축과 수직을 이루는 평면위에 그려진 지구 둘레의 커다란 원이다. 지구상의 적도는 지구를 남반구(南半球)와 북반구로 나누는 위도 0°선으로 지표면의 위도를 측정하는 가상의 기준선이 된다. 따라서 지금 적도에 선 나의 왼발은 남반구를 오른발은 북반구를 밟고 있다. 적도의 둘레는 약 4만0075Km이며 1년에 두 변, 춘분과 추분에 태양이 적도 바로 위에 온다.

오후 6시경부터 다시 고도가 높아지면서 구곡양장의 꼬부랑길이 또 나타났다. 왕복2차선 도로이기에 오르막에서 느린 화물차를 만나면 추월할 수도 없어 마냥 그 뒤를 느릿느릿 쫓아 올라가야만 한다. 오늘도 갈 길은 먼데 날이 어둡기 시작하나 아직 산 속을 헤매고 있으니 조금 불안하다. 그러나 아직은 덜 어두운데 멀리 가로등이 보인다. 도시에 들어선 것이다. 오후 7시 15분, 드디어 12시간 15분 만에 부낏띵기(Bukittinggi, 해발900m)의 호텔에 무사히 도착했다. 지난 3일간 험한 산길을 무사히 운전한 운전기사에게 우리들은 요란한 박수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