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낙원을 찾아가는 길
지난 7월16일 20시 45분. 탐사단을 태운 열차는 정확히 우루무치역을 출발한다. 침대가 있는 비싼 열차여선가, 경제대국을 지향하는 중국의 변모된 모습인가. 허겁지겁 열차에 오른 승객들이 한숨을 돌릴 즈음, 끝 모를 고비사막으로 석양은 지고 기차는 소리 없이 흐른다. 움직이는 것은 창밖 풍경이고 고요함 뿐이다. 그 사이로 어느덧 사막을 에워싼 어둠이 창가에 다가선다. 보이는 것도 움직임도 없다. 정중동(靜中動). 열차의 미세한 떨림만이 오아시스를 향하는 우리의 설렘을 증폭시킨다. 그리고 그 설렘은 창밖을 넘어 어둠의 고비사막을 질주한다. 한 고비, 열 고비. 열차보다 더 빨리 바람보다 더 멀리.

둔황(敦煌)은 감숙성(甘肅省) 서부 주천지구(酒泉地區)와 하서주랑(河西走廊) 서쪽 끝, 당하(黨河) 유역 사막지대에 위치해 있다. 막고굴(莫高窟)은 돈황에서 남쪽으로 25km 거리에 있다. 둔황은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의 관문으로, 고대의 동서교역·문화교류 및 중국의 서역 경영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다음날 6시 25분. 돈황을 찾은 우리에게 보내는 축복의 환영식인가. 반가운 먼지잼이 내린다. 탐사단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다. 돈황가는 길은 오직 한 줄기다. 사막을 가르는 일직선의 도로가 가도 가도 지평선에 닿아있다. 도로엔 어느덧 태양이 작열하고 고비는 멀찍이 근사한 신기루를 만들어 놓는다.
기원전 1세기 초. 한무제는 돈황을 서역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아 옥문관과 양관을 설치했다. 호탄에서 생산되는 유명한 옥(玉)이 옥문관을 통해 들어오고, 비단과 도자기 등이 양관을 통해 사막을 건너 서역으로 갔다. 그리하여 중국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 돈황은 변경도시지만 수많은 민족들이 왕래하는 국제적인 무역도시로 번성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거래를 하고 휴식을 하고 또 각자의 직업에 맞게 여행을 떠났다.

위성의 아침비 잔 먼지를 고르고

주막집 버들가지는 오늘따라 푸르러라

여보게 친구, 술 한 잔 더 하게나

양관 지나면 아는 사람 뉘 있으리.


시인 왕유가 친구를 배웅하던 날에도 먼지잼이 내렸던가. 폐허로 변한 양관은 모래바람만 껴안고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다.

국제도시 돈황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의 건강과 평안을 빌었다. 죽음의 사막을 넘나들며 그들은 신심(信心)을 돈독히 할 수밖에 없었다. 굴을 파고 부처를 모시며 저마다의 소원을 빌었다. 실크로드의 보고(寶庫)인 막고굴은 이렇게 탄생했다. 막고굴은 또한, 세계적으로 알려진 '돈황학'의 슬픈 시원지이기도 하다.

설렘으로 막고굴을 향한다. 이곳은 방문객의 국적에 따라 개방하는 석굴이 틀리다. 5호16국시대인 4세기 중엽부터 천 년 동안 만들어진 벽화와 불상들이 약탈의 상처를 뚫고 찬란한 빛을 발한다. 그중에는 한반도에서 온 우리 선조의 벽화도 보인다. 서역악기인 비파, 서역의 춤인 호선무 사이로 우리 민족의 대표악기인 장고의 초기모습도 보인다. 혜초 스님의『왕오천축국전』도 이곳의 17호굴에서 발견되었다. 막고굴에는 왕과 귀족은 물론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염원을 향한 신심을 표현한 불상들이 앉았거나 누웠거나 서 있다.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그들의 혼신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들은 불상과 벽화를 만들고 흡족했으리라. 평안과 낙원이 예있으리라 여겼으리라. 많은 석굴들 사이, 어느 빈한한 백성이 가득한 신심만 가지고 왔다. 너무나 화려하고 장대한 석굴을 보며 가슴이 저려왔으리라. 그는 끝없이 추락하는 자신의 마음을 추슬러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벽에 아주 작은 굴을 뚫고 자신만의 낙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평안했다. 그러나 막고굴의 오늘은 그마저도 황폐하다. 그 청년의 갸륵한 낙원과 소망은 어디로 갔는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버려진 낙원, 돈황을 찾은 제국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낙원을 파괴·약탈했다. 그들은 흡족해한다. 그들이 원하는 낙원 건설계획에 따라 낙원이 모두 이동했기 때문이다. 부서지고 빼앗기고 산산이 흩어지는 것이 곧 새로운 낙원의 건설이라는 것을 부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수많은 부서짐과 빼앗김 속에서도 막고굴은 마르지 않는다. 그리하여 지금도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낙원, 소중한 낙원에 대해 알려준다. 순수한 영혼들이 만들어낸 찬란한 낙원 막고굴, 불현듯 다가오는 부처의 얼굴이 시대를 넘어 너무도 곱다.


작은 꽃 속에

큰 하늘이 피어 있어

법(法)이라 한다

네 작은 담론 안에

우주가 요동하는 것

사랑이다



김지하 시인처럼은 아니더라도 막고굴에서 두 손 모두고 경건하게 서보라. 그러면 이 시대 당신이 가야할, 그리고 추구해야만 할 낙원이 보일 것이리니.
<인천일보 실크로드 특별취재팀>


BC 1세기 초에 한(漢)나라의 무제(武帝)는 이곳을 서역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아 둔황군(敦煌郡)을 두고 부근에 옥문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의 두 관문을 설치했다. 둔황은 서쪽 끝에 위치한 까닭에 서역으로부터 오는 3개의 육로통상 노선이 모두 통하는 허브였다. 이는 둔황이 국제 무역도시로 번영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그후 춘추시대에는 과주(瓜州), 당나라 때는 사주(沙州)로 개칭하여 동서무역의 요지로 삼았다.

막고굴은 4세기 중엽인 366년, 전진(前秦)의 승려 낙준에 의하여 시작되어 13세기까지 지속되었고, 현재 4백69개의 석실이 보존되어 있다. 청나라 말기 이곳의 주지이던 왕원록 도사가 동굴을 보수하려다가 숨겨진 석실을 발견하였는데, 그 안에는 4만 여점의 고문서가 있었다. 이 문서들은 1907년, 1909년에 영국의 스타인 및 프랑스인 폴 펠리오 등에 의하여 해외로 탈취 당했다. 우리나라의 혜초 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도 이곳에 있었는데 펠리오에 의해 프랑스로 반출되었다. 이후 일본, 소련, 미국 등서도 문서는 물론 벽화까지 뜯어가고 현재는 몇 천 점의 문서와 불완전한 벽화만 남았다. 결국 9백년간 잠자던 문화유산은 발굴과 동시에 전 세계로 흩어져 고아가 되고 만 것이다.


막고굴의 찬란한 역사

BC 1세기 초에 한(漢)나라의 무제(武帝)는 이곳을 서역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아 둔황군(敦煌郡)을 두고 부근에 옥문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의 두 관문을 설치했다. 둔황은 서쪽 끝에 위치한 까닭에 서역으로부터 오는 3개의 육로통상 노선이 모두 통하는 허브였다. 이는 둔황이 국제 무역도시로 번영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그후 춘추시대에는 과주(瓜州), 당나라 때는 사주(沙州)로 개칭하여 동서무역의 요지로 삼았다.

막고굴은 4세기 중엽인 366년, 전진(前秦)의 승려 낙준에 의하여 시작되어 13세기까지 지속되었고, 현재 4백69개의 석실이 보존되어 있다. 청나라 말기 이곳의 주지이던 왕원록 도사가 동굴을 보수하려다가 숨겨진 석실을 발견하였는데, 그 안에는 4만 여점의 고문서가 있었다. 이 문서들은 1907년, 1909년에 영국의 스타인 및 프랑스인 폴 펠리오 등에 의하여 해외로 탈취 당했다. 우리나라의 혜초 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도 이곳에 있었는데 펠리오에 의해 프랑스로 반출되었다. 이후 일본, 소련, 미국 등서도 문서는 물론 벽화까지 뜯어가고 현재는 몇 천 점의 문서와 불완전한 벽화만 남았다. 결국 9백년간 잠자던 문화유산은 발굴과 동시에 전 세계로 흩어져 고아가 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