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의 영화이야기
위상이니 권위 따위의 어휘는 사치가 된지 오래다. 요즘 들어 새삼 영화 평론가의 역할·기능 등에 대해 깊이 고민 중이다. 주된 계기는 지난 달, 데뷔 15년 만에 첫 출간된 첫 평론집 <영화의 매혹, 잔혹한 비평>(도서출판 작가)다. 평론가로서 그 간의 삶을 (중간 )결산하기엔 터무니없이 초라하고 부끄러운 책이다. 위기를 넘어 영화 평론의 죽음이 말해지는 오늘날, 영화 평론가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할까.

사실 비평 활동을 해오면서 줄곧 위의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거의 없었다. 지금보다 훨씬 더 호시절을 구가하던 때에도 그랬다. 크고도 깊은 자조에 시달리던 한 동안은 심지어, 평론가는 언론 매체의 '들러리'요 나아가 '매문'을 일삼는 '창부'요 '기생충'이라고 여기기도 했었다. 어떤 각성에 의해 어느 순간 그런 자괴감 어린 자조를 훌훌 떨쳐내기 전까지.

2007년 이른바 '디워 사태'를 겪으며 고민은 보다 더 깊어졌다. 그 사태는 예의 평론의 장(場)이 더 이상 평론가의 영역이 아니라 소위 네티즌들의 놀이터라는 현실을 확연히 확인시켜줬기 때문이다. 이제 영화 평론가들은 매체는 물론 네티즌에 의해서도 소외를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런 마당에 그저 평론가라는 타이틀에만 매달린 채, 버티기에 급급할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지금의 고민은 따라서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강도·심도 등에서는 제법 큰 차이는 나지만 말이다.

평론집 머리말에서도 피력했듯, "비평은 어차피 일종의 '기록으로서 준-역사'요 당대 현안에 대한 크고 작은 '문제 제기'"라는 신념으로, 만만치 않은 15년의 세월을 버텨왔다. 평론의 길을 완전히 접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그럴 작정이다. 현실에선 그러나 신념처럼 실천하지 못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매체와의 동반자적 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다고 자위하면서, '가이드'로서 평론에 주력해왔던 것이다. 기껏해야 10매 전후의 단평적 잡문 쓰기에 열중하면서.

남들은 그렇게도 수이 내곤 하건만, 짧다고만은 할 수 없을 15년 만에 첫 번째 평론집을 세상에 내 놓은 까닭은 무엇보다 그런 잡문을 묶어 내고 싶지 않다는, 다분히 허세 섞인 자격지심에서였다. 하지만 어쩌랴. 그 잡문들이 다름 아닌 지난 내 삶의 으뜸 흔적이요 증거인 것을! (그래, 가능하다면 그 동안 방치해놓다시피 한 적잖은 분량의 잡문들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심산이다. 오랜 세월이 걸린다 할지라도.)

잡문 중심의 가이드로서의 영화 평론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외려 그 반대다. 정보 홍수 시대에, 이 지구상에 대중 매체가 존재하는 한 가이드 기능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내 요지는 그 역할이 더 이상 본격적 함의에서의 평론가의 몫이 아니리라는 것이다.

다짐에 다짐을 하곤 한다. 신념으로만이 아니라 행동적으로 준-역사로서 기록에, '인간적'이길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번뜩이는 서슬 퍼런 검광이 보이"는 치열한 문제 제기로 나아가자고. 비록 잡문적 성격이 농후하고 언제까지일 지는 모르지만, '전찬일의 영화 이야기'도 그런 장으로 가꿔가겠다고 다시금 결심을 해본다. 혹 지키지 못할, 너무 비장한 결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