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인천도호부 청사와 문학월드컵 경기장
도호부청사 홍살문과 향교 전경
인천문학월드컵 경기장 맞은편에 있는 인천도호부청사(http://www.dohobu.org)는 진품이 아닌 짝퉁이다. 진품인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호 인천도호부청사는 남구 관교동에 있는 문학초등학교 안에 초하한 옛 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을 8도(道)로 나누고 그 아래에 대도호부, 목, 도호부, 군, 현을 두었으며 이를 통하여 지방행정업무를 관장하였다. 따라서 도호부는 조선시대 행정기관의 하나로 상급기관인 목(牧)과 하급기관인 군(郡)과 현(縣) 사이에서 행정을 담당했던 관청이다.

인천의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도호부는 두곳이 있는데 하나는 현 계양구에 있는 부평도호부 와 인천도호부가 그것이다.

인천도호부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고려시대 웅부(雄府)였던 부평도호부 보다는 격이 낮았던것 같다. 이는 역사적인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조선 세조6년(1460) 세조의 어머니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沈)씨의 외가가 인천이라는 이유로 도호부로 승격되고 있으며 인천부읍지에 따르면 인천도호부에는 객사(客舍)·동헌(東軒)·내동헌(內東軒)·삼문(三門)·사령청(使令廳)·향청(鄕廳)·군관청(軍官廳)·훈무당(訓武堂)·옥사(獄舍)·어용고(御用庫)·군기청(軍器廳)등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규모면에서도 부평부읍지의 기록 보다는 격이 떨어진다.

1883년 제물포가 개항장이 되어 인천관아가 옮겨가게 되면서 점차 쇠락의 길에 접어들고 있으며, 1913년에는 일제의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부천군청과 부천보통학교(현 문학초등학교)를 거쳐 경찰주재소 등으로 사용되면서 원형을 상실하고, 화재로 인하여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인 내동헌은 당시 먹고 살기 힘들다는 이유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발상으로 또 한번 훼손되는 비극을 겪는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알리는 문화관광 안내자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도호 부청사. 이 곳을 찾는 내 외국인의 수는 매년 15만명을 넘어선다고 한다.
문학초등학교를 신축하면서 후손들의 역사의식 고취와 미래의 관광자원인 문화유물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많은 부분을 헐어 버리고 당초 규모보다 축소된 전면 6간, 측면 2간반으로 옮겨져 인천도호부의 원형적인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지난 2001년 인천시민의 날을 기념해 복원된 현 도호부 청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1878년 화도진도(花島鎭圖)를 근거로 하여 신축되었다.

2003년 (사)서해안 풍어제 보존회를 운영주체로 새로운 주인을 맞은 인천도호부 청사는 인천시의 지원하에 전통문화체험 프로그램을 무료로 운영하여 유,초등생들의 체험학습에 특히 인기가 높고 또한 중,고등학생들의 역사문화의식을 고양하면서 인천시민들에게는 화려하고 우수한 우리의 전통문화를 알리는 문화관광안내자의 역할을 톡톡히 잘 하고 있는 대표적인 모범 문화행정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월드컵 경기장 조형물에서 바라본 경기장
연안부두 축제와 전 세계 영혼의 춤꾼 축제를 기획한 문화행사 기획전문가 정현주 실장의 철저한 준비하에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진행되며 전통혼례식을 비롯하여 윷놀이, 널뛰기, 제사상차려보기, 전통 악기체험 등 다양한 상설 전통민속놀이가 펼쳐진다. 도심의 속진 속에서 잊혀져가는 우수한 전통문화를 경험한 내,외국인의 수는 매년 15만명을 넘어선다고 한다.

인천문학월드컵경기장(http://www.munhak.or.kr)은 지하철에 닿아 있는 편리한 접근성과 그 방대한 넓이와 조형 시설물로 인하여 힘찬 스포츠사진을 만들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문학경기장은 항구도시 인천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돛단배의 모습을 한 최첨단 케이블 막구조(Cable Structure) 공법을 채택해서 야간조명시에는 커다란 돛단배가 물위를 둥실둥실 떠다니는 형상으로, 경기장 건축에 새로운 역사를 썼다고 평가받는 야경이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오는 6월까지 도심 속 오아시스 같은 쉼터를 조성한다는 목표 아래 삭막한 콘크리트 담장위에 담쟁이덩굴과 능소화를 심고 인공폭포와 연못을 포함한 운동시설 설치가 마무리 되면 한발 더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천시민의 쉼터로 다가서게 될 것 같다.

과거 인천에서 암벽등반을 연습하려면 문학산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작은 바위덩어리들을 찾아 헤매며 연습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인천시민을 위한 사회체육 시설물인 인공암벽연습장에서 만난 인천암벽등반모임(http://cafe.daum.net/cgan 등반대장 안충근)의 회원들은, 인천 도심속에 이런 거대한 구조물로 만든 스포츠 클라이밍용 인공암장의 설치는 인천산악계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하고 있었다.

히말라야와 고산원정 그리고 산을 사랑한지 30년이 넘는 노련한 클라이머들이 다수 활동하고 있었으며 여성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시설사용에 있어 아쉬운 점은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많은 스케이트보드나 인라인스케이트를 즐길 수 있는 X게임장을 가두어 둔 시설로만 방치해 두지 말고 울타리를 걷어 버리고 보다 자유롭게 개방하여 사용의 빈도를 높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가 입춘인 듯 싶더니 불과 몇 일전에 대보름이 지나갔다.

인천도호부청사에서 인천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고 전통복장과 함께 추억을 카메라에 담았다면 두손을 꼭 잡고 길을 건너 드넓은 문학경기장을 산책하면서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다지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확인하는 것이 어찌 작은 행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행복도시 인천이다.
/글·사진=정암 차주현

 
Ilford Sportsman camera


일포드 스포츠맨 카메라는 편리한 사용과 휴대성이 생명인 35mm 스냅 카메라다.
지금으로부터 51년전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6·25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되는 휴유증으로 전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메고 폐허 속에서 전후복구의 어려움을 격고 있던 시기인 1957년에 영국에서 탄생 한다.
원래 일포드는 영국 에섹스(Essex)주 서남부에 있던 도시로 현재는 레드브릿지(Redbridge)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일포드는 흑백사진계의 대부이며 126년의 사진역사를 자랑하고 필름과 인화지 그리고 현상약품 등을 생산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사다. 제조넘버262002번의 이 카메라는 코닥 카메라의 레티나2S 시리즈를 많이 닮았는데 이는 필름과 인화지만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한계에서 탈피 하고자 카메라를 생산하며 사업을 다각화 했던 흔적이 엿보인다. 사진속의 일포드 스포츠맨 카메라는 1962년 서독에서 생산된 레인지파인더 형식의 거리계가 없는 목측식 카메라로 좌측 레버에는 일포드의 Pan F 필름, FP3, HP3, HPS, Colour 필름을 장착했음을 알 수 있는 표시가 되어있다. 렌즈의 최대밝기는 f2.8~22며 렌즈 아래쪽에 동그란 점은 플레쉬 전선 인입구다. 독일 장인들의 기술력이 돋보이는 푸른 코팅의 화인더는 시원한 화각을 제공하고 있으며 열십자 모양의 중앙 측거점은 사진구도를 잘 잡을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생산되기도 한 이 카메라는 스포츠맨 오리지널을 시작으로 오토 레인지스타일, 스포츠마스터, 스포츠프론토 등으로 제품을 꾸준히 업그레이드 하다가 지금은 단종된 126필름을 사용하는 일포드 스포츠 인스턴트 시바를 끝으로 역사속의 카메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