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촉은 망했어도 위나라는 처가와도 같아"
제4부, 천하는 누구의 것인가
12. 어찌 저런 자가 황제가 되었는가

취운랑에 있는 아두백. 망국의 군주 유선이 낙양으로 가던 중 이 나무 밑에서 비를 피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후세 사람들이 나약하고 우둔한 유선을 경계하기 위해 제일 못생긴 나무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서촉 생각이 몹시 나지 않소?"
"이곳에서 지내는 것이 즐거워 서촉 생각은 나지 않사옵니다."
"폐하! 어째서 서촉 생각이 안 난다고 대답하셨사옵니까? 다시 물으면 '선인의 산소가 멀리 촉 땅에 있기 때문에 서쪽을 바라보면 슬픈 생각이 나서 하루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사옵니다'라고 우시면서 대답하소서."
"어째 각정이 시킨 말 같소이다."
"앗! 어떻게 아셨사옵니까?"

263년. 후주 유선의 항복으로 촉한은 멸망했다. 유비가 나라를 세운지 43년이 되는 해였다. 유선은 성도에서 낙양으로 이송되었다. 위나라 정권의 최고실력자인 사마사는 유선을 안락공(安樂公)에 봉하고, 저택과 생활비를 지급하며 정중하게 대우했다. 유선은 기분이 좋았다. 사마소가 주최한 연회에서 촉나라의 음악이 연주됐다. 유선을 따라온 신하들이 망국의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그는 태연하고 즐거운 모습으로 미소만 지었다. 사마사가 촉 생각이 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유선은 오히려 즐겁기만 하다고 대답했다. 사마사도 어이가 없었다. "사람이 무정하기가 저 지경에 이르렀으니 제갈공명이 살아 있다고 해도 오래도록 온전히 보좌할 수 없었을 터, 하물며 강유야 말하여 무엇하리요?" 이때부터 사마소는 유선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다.

환락 쫓아 즐거워하며 만면의 웃음 띠고
생사존망 생각지 않고 조금도 슬퍼함이 없네
타향에서 즐겁게 지내며 고국을 잊으니
바야흐로 후주가 용렬한 사람임을 알겠네

유비는 물론 조운이나 제갈량이 유선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 어찌했을 것인가. 사마소조차도 멸시를 했는데 한 평생 국궁진췌로 국가 건설에 매진한 이들은 그 자리서 졸도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유선은 황제 자격이 없는 인물이었다.

취운랑 안에 있는 장비정. 취운랑의 측백나무를 장비가 조성했다는 전설에 따라 우물의 이름을 장비정이라고 붙여놓았다.
촉이 멸망한 지 13년이 지나서 오나라의 손호도 진나라에 투항했다. 손호가 낙양에 도착하여 사마염을 알현했다. "짐이 이 자리를 마련하고 그대를 기다린 지 오래 됐소이다." 사마염의 말에 손호가 답변했다. "신도 남방에 이런 자리를 마련하고 폐하를 기다렸습니다." 손호의 이 말은 망국의 군주로서 생명보존에 급급하여 몸을 낮춘 겁약한 유선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유선은 월왕 구천처럼 복벽의 마음이 없음을 나타내어 사마소를 안심시킨 다음 후일을 도모하려고 했을까. 설령 그러했다 하더라도 시대는 누구나 통일을 염원하고 있었다. 그러한 때, 유선의 태도는 손호의 행동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한 나라를 경영한 군주로서가 아닌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무사태평(無事泰平)한 여생만이 보일 뿐이다. 황제가 이와 같았으니 어찌 국가가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검각산을 넘은 몸은 기진맥진이다. 차장 밖의 풍경도 들어오질 않는다. 어느덧 날은 화창해지고 길 양쪽으로는 측백나무가 울창하다. 세계적인 측백나무 군락지인 취운랑(翠雲廊)이 신선한 향기로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었다. 취운랑은 검각현을 중심으로 사방에 걸쳐 총 150㎞를 잇는 길로 옛날부터 삼백장정십만수(三百長程十萬樹)로 불렸다. 취운랑은 수령이 오래된 측백나무가 즐비한데 많은 수만큼이나 모습도 천차만별이다. 두 그루의 나무가 가지를 서로 교차시키고 있는 원앙백(鴛鴦柏), 굵기와 높이가 장수 같다고 하여 대수백(大帥柏) 등 각양각색의 나무들이 그에 어울리는 이름을 달고 있다. 멀리서보면 소나무와 같으나 가까이서 보면 측백나무인 송백장청수(松柏長靑樹), 일명 검각백(劍閣柏)은 수령이 2천3백년된 것으로 취운랑에서도 오직 한 그루밖에 없는 매우 희귀한 수종이라고 한다. 숲속 회랑을 돌아보는데 옆으로 뻗은 가지가 잘려있고, 밑동도 커다란 구멍이 있는 볼품없는 측백나무가 있다.

이름을 보니 아두백(阿斗柏)이다. 아두는 유선의 어렸을 적 이름이다. 촉이 멸망하고 유선이 낙양으로 이송되어 가던 중, 이 나무 밑에서 비를 피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후세 사람들이 진작 잘라버렸어야 할 이 나무를 그대로 둔 채 아두백이라고 부르는 것은 나약하고 우둔한 유선의 행동을 경계하려는 의미일 것이다.

취운랑의 측백나무 숲이 끝나는 재동현에 칠곡산(七曲山)이 있다. 칠곡산 대묘당 앞에는 제갈량이 세웠다는 송험정(送險亭)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어려운 곳을 빠져나와 발끝이 안정되었다. 이제부터 평탄한 길이지만 정신을 놓아서는 안 된다.' 매사에 치밀했던 제갈량이 자칫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됨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 것인데,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글귀가 아닐 수 없다.
 
/글·사진=허우범 인하대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서촉은 망했어도 위나라는 처가와도 같아"

유선의 뛰어난 처세술

후주 유선의 황후는 장비의 딸이었다. 장비의 처는 하후패의 사촌 여동생이다. 하후패는 조조가 신임한 하후연의 차남이다. 조조의 부친인 조숭은 하후씨의 아들이었는데 입양되어 조조를 낳았다. 그러므로 조조는 하후씨의 후손인 셈이다. 하후연 또한 조조의 동생뻘이 된다. 조조가 하후씨와 겹사돈을 맺으며 특별히 대우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219년. 유비가 한중을 차지할 때, 황충이 정군산을 지키고 있던 하후연을 살해했는데, 이때 장비의 처가 즉시 그를 장사지내 줄 것을 청했던 것도 하후씨 집안이 장비의 처가였기에 이러한 맥락에서 장비처가 당숙에 대한 도리를 다하고자 한 것이었다.

249년. 위나라의 사마의가 정변을 일으켜 대권을 차지하자, 하후패는 반역죄에 연루될 것을 두려워하여 촉나라로 투항한다. 하후패는 촉으로 오는 길인 음 평도에서 길을 잃었지만 이 소식을 들은 촉한의 유선은 급히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성도까지 안내하게 하고 자신이 직접 영접했다. 그리고 하후패에게 말했다.

"경의 부친께서는 행군 중에 해를 당했을 뿐이지 우리 선친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오."

아무리 전란시대라고 하지만 하후연의 자손들과 유비 및 장비 자손들 간의 인척관계가 서로의 위급함을 모면시켜주는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유선에게 있어서 위나라는 처가와도 같았다. 등애군이 쳐들어와서 의논이 분분할 때, 초주가 모든 의견을 물리치고 위나라에 투항할 것을 권유하자 이를 선뜻 따랐던 것도 유선의 이와 같은 마음에서다. 또한 위나라의 낙양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며 편안하게 생활한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에서다. 오나라의 손호가 망국의 군주로서 비애를 삼켜야했다면, 유선은 처가에 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마씨의 권력 앞에 무너지는 위나라도 더 이상 유선에게 편안한 곳이 아니었다. 그래도 유선은 안락공이란 이름처럼 낙양에서의 생활을 안락하게 보내다 죽었다. 군주로서는 우매하고 용렬한 유선이었지만, 처세술은 뛰어난 개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