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디아 궁전 회담모습 보존 신문기사 사진도 전시 감회
2007년 7월 30일 (월, 제9일)

아침 일찍 베란다에 나가 보았다. 왼쪽 아래 저 멀리 바라보이는 흑해해변의 모습은 매우 아름답다. 얄타는 흑해의 크리미아반도 동쪽해안에 있으며 흑해연안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리조트이다. 19세기부터 러시아혁명까지는 황제나 귀족들의 별장이 많이 있던 곳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얄타와 그 근교를 관광하기로 했다. 맨 먼저 리바디아 궁전으로 갔다. 이 궁전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여름별장으로 1911년에 건립되었다.

리바디아 궁전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2월 4일~11일까지 미국, 영국, 소련, 3개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처칠 수상, 스탈린 원수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의 기본방침에 관하여 협의한 '얄타회담'이다. 정식명칭은 크림회담이다.

이 회담에서는 전쟁수행과 전후처리문제, 국제연합창설 등에 관한 중대한 결정이 이루어졌다. 독일에 관해서는 분할점령, 비무장화, 전쟁범죄자의 처리 등이 확인되었고, 폴란드에 관해서도 다루어졌다. 소련의 대일참전에 관한 비밀협정에서 소련은 독일 항복 후 3개월 이내에 대일전에 참가하는 대가로 사할린 가라후도, 樺太, 쿠릴 열도[찌시마 열도, 千島列島]를 획득하고, 일본의 보유지 처리와 관련하여 다롄항[大連港]의 국제화, 소련의 뤼순[旅順] 조차권의 회복, 만주철도의 중소공동운영 등의 권익을 보장받았다.

이번에 같이 여행하는 성균관 대학교의 서중석 교수(근대사)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38선이 얄타회담에서 결정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그 것은 근거가 없다고 한다.

얄타에는 비행장도 없고 철도도 연결되어 있지 않으므로 얄타회담에 참석하기 위하여 스탈린은 85km 북쪽에 있는 심페로폴 공항을 이용하였고, 루즈벨트와 처칠은 세바스토폴의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두 사람은 62년 전 어제 내가 오던 바로 그 길을 지나 이곳 리바디아 궁전으로 왔다.

얄타회담이 열렸던 1층에는 당시의 상황이 재현되어 있어 "내가 지금 역사의 현장에 와있구나..."하는 감회가 솟아오른다.

당시 회담에서 사용되었던 원탁, 루즈벨트의 침실, 식당, 역사적인 사진, 신문기사 등이 전시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1941년은 내가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그 때 일본은 적성국인 미국과 영국을 '기찌꾸 베이에이'(귀축미영, 鬼畜米英)라고 비하하였다. 즉『귀신과 짐승 같은 미국, 영국』이라는 뜻이다. 또한 루즈벨트 대통령을 loose belt(허리띠가 헐거운...)라고 놀려댔다.

오후에 Nikitsky 식물원을 견학했다. 도시 한가운데에 이렇게 넓은 식물원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지금까지 내가 본 식물원 중에서는 브라질의 아마존에 있는 '마나우스'가 제일이다.

바다에서 1600km 강을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밀림의 섬' 같은 도시, 마나우스는 도시를 만들 때 1/2의 땅을 원시림 그대로 남겨두었다. 따라서 마나우스의 식물원에 들어서면 원시림 속에 들어온 것처럼 여러 가지 식물과 동물을 볼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인도네시아의 보고르 식물원(1817년 창설)을 본 생각이 난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얄타의 식물원도 넓은 면적에 많은 식물이 자라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식물원이 한 곳도 없을까? 지금은 기온이 33℃나 올라가 걷기 매우 힘들다.

오늘은 일찍 호텔로 돌아왔다.

우크라이나는 동유럽에 있으며 키예프는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우크라이나의 수도이다. 9~12세기에 러시아 국가의 원천이 된 수도로 키예프·루시를 형성하였다. 이 국가는 13세기 초, 몽골족의 침입으로 끝내는 붕괴되었다. 동슬라브족 중에서 러시아인(대·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소·러시아인), 벨로루시인(백·러시아인) 등이 갈라졌다.

14세기에는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은 리투아니아 대공국(大公國)에 속하고 일부는 폴란드의 지배하에 있었다. 1569년, 두 나라는 합병하여 단일 폴란드(국)를 만드니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다. 엄한 폴란드의 압제에 대하여 우크라이나인은 각 방면에서 꾸준히 저항을 했다. 1654년, 독립운동 지도자, '보그단·흐멜니츠키'는 러시아 황제에 대하여 폴란드로부터의 보호와 러시아의 종주권을 제안했다. 이것을 받아들인 러시아는 폴란드와 싸워서 드네프르 강의 좌안 및 키예프의 영유를 승인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자치를 인정했으나 18세기후반에는 완전히 러시아의 일부로 만들어버렸다.

1917년의 혁명 후 한 때 완전독립을 선언하는 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동시에 소비에트정부도 탄생하고, 그 후 3년간에 이르는 내전이 계속되었다. 1919년, 우크라이나 사회주의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1920년에 소비에트·러시아와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1922년 12월에는 소련연방의 형성에 참가했다.

1990년 7월 16일, 공화국주권선언을 하고, 국명을 지금의 우크라이나로 변경하였다. 같은 해 12월 1일, 독립에 관한 국민투표(투표참가자의 90%이상의 압도적다수가 독립을 지지)를 실시하여 드디어 독립했다.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소련연방 붕괴의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