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천하는 누구의 것인가
10. 촉군의 울음소리만 검각을 넘어가네.
 
촉군이 비록 물러가기는 했지만 결국 그들에게는 이긴 기세가 있고 우리에게는 허약한 실체가 있으니 반드시 그들이 쳐들어올 첫째 이유이고, 촉군은 모두 제갈량이 훈련시킨 정예병이라 지휘하기가 쉽지만 우리는 장수가 때도 없이 바뀌고 군사 또한 훈련이 미숙하니 반드시 쳐들어올 둘째 이유이고, 촉군은 대부분 배를 타고 이동하여 편하지만 우리 군사는 모두 걸어야 하기 때문에 지치게 되니 그들이 반드시 쳐들어올 셋째 이유다.
 
적도, 농서, 남안, 기산 네 곳은 모두 싸워서 지켜야 할 곳이기 때문에 촉인들은 동쪽을 치는 체하다가 서쪽을 치고, 남쪽을 치는 체하다가 북쪽을 쳐 우리는 군사를 나누어 지킬 수밖에 없는데, 촉군은 한 덩어리가 되어 쳐들어오니 이것은 그들이 우리 군사의 4분의 1만 대적하는 꼴이 되므로 반드시 쳐들어올 넷째 이유이고, 촉군이 만약 남안이나 농서로 쳐들어오면 강인들의 곡식을 먹을 수 있고 만약 기산으로 쳐들어오면 보리가 있어 먹을 수 있으니 그들이 반드시 쳐들어올 다섯째 이유이다."

어이없게 암살당한 비의의 뒤를 이어 강유가 군사 최고책임자가 되었다. 비의의 제재에 북벌을 감행하지 못하고 있던 강유는 제갈량의 뜻을 잇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위나라 군과 대결했다. 강유는 장수였기에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다.
하지만 장완과 비의처럼 정치적 감각은 탁월하지 못했다. 오직 제갈량이 이루지 못한 북벌에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위나라의 상대는 등애였다. 등애는 강유가 북벌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다섯 가지 이유를 정확히 꿰고 있는 뛰어난 장수였다.
강유는 서방 풍속에 익숙했다. 그래서 강족을 꾀어 우군으로 삼고 농서지역을 위나라에서 분리하여 지배하려는 전략을 폈지만 결실을 이루지 못했다. 강유의 출병은 계속되었지만 이렇다 할 전과는 없었다. 전쟁은 계속되었고 국력은 피폐해졌다. 높아진 원성만큼 북벌은 어려워졌다.
몇 번의 북벌이 실패로 끝나자 강유는 답중에서 둔전을 치며 기회를 엿보았다.
263년. 위나라의 장군 종회는 10만 대군으로 촉을 공격했다. 농서에 있던 등애가 합류했다. 강유는 후주에게 급히 표를 올렸다. 양평관과 음평도는 가장 중요한 곳이므로 장익에게는 양평관을, 요화에게는 음평교두를 지키게 해고 즉시 오나라로 사자를 보내 급히 구원을 요청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후주는 움직이지 않았다. 환관 황호의 농간에 빠져 주색에 놀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유는 부하 장수들과 함께 최후방어선인 검문관을 사수했다. 강유와 그의 군사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위나라 군대를 막았다. 때때로 관문을 나와 통렬한 타격을 입혔다.
그렇게 하길 3개월. 종회는 관문을 통과하기에는 손해가 크고 군량도 바닥을 보이고 있어서 철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종회가 검문관에서 전진하지 못하고 있을 때, 등애는 2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음평소로를 따라 험준한 마천령을 넘었다. 제갈량이 오래 전에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음평의 준령은 하늘처럼 까마득하여
검은 학도 배회하며 날기를 겁내고 있건만,
등애가 모전 감고 이곳으로 내려와서
무후의 예고를 맞추게 될 줄 그 어찌 알았으랴

새도 넘지 못한다는 검문관 입구. 검각산 72봉우
리가 첩첩히 둘러싸인 험준한 산비탈에 위치한
검문관은 사천을 지키는 최고의 방어기지이다.
마천령을 넘은 등애의 군사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공격은 파죽지세고 점령은 식은 죽 먹기였다. 풍전등화. 촉한의 운명도 끝나가고 있었다.
산은 하늘과 맞닿은 듯 험준하고 자동차는 구불구불 산길을 비켜 돈다. 숨이 차 헐떡이는 차창 밖으로 끝 모를 절벽이 아찔하기만 하다.
봉우리를 삼킨 운무가 좌우를 휘감고 내려와 그날의 아픔을 기억하려는 듯 포효의 빗줄기를 뿜어낸다. 깎아지른 절벽이 72봉우리 마다 예리한 검이 되어 하늘을 찌르고 있는 곳. 일찍이 이백이 "검각의 문은 높이가 5천장이고 돌은 누각이 되어 구천을 연다."고 노래한 검문관이 험준한 산맥 사이 길목 한 가운데 우뚝하다.
관소의 문을 닫으면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고, 한 명이 관을 지키면 만 명을 무찌를 수 있다는 말이 그야말로 제격인 요새다. 검문관에서 청두(成都)까지는 약 300㎞. 이곳을 떨어뜨리면 사천을 얻는 것과 같고, 이곳을 지키면 사천은 안전하다는 말이 있듯 이곳은 촉의 북쪽 중요방어선이다. 그리하여 병가필쟁의 땅이기도 했다.
검문관 입구 바위에는 시인묵객들이 남긴 글귀들이 즐비하다.
강유가 지휘를 했다는 영반취를 둘러보고 검각산을 올랐다. 절벽을 깎아 만든 계단 길은 뒤조차 돌아볼 수 없을 지경이고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바윗길은 맨 몸으로 지나기도 벅차다. 숨 가쁨에 쉬기를 몇 번이나 했던가.
땀범벅이 된 윗도리는 소금이 버석거린다.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과연 검각(劍角)이란 이름에 걸맞게 기세의 장대함이 비할 곳이 없다. 검각산의 남쪽으로 내려가니 논두렁길 옆으로 나무가 우거진 조그만 봉분에 커다란 비석이 있다. 제갈량의 유지를 받들지 못하고 비통하게 죽음을 맞이한 강유의 묘였다.
강유는 청두에서 죽었다. 그것도 위나라에 반기를 들었기에 시신이 보호되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어째서 머나먼 이곳에 묘가 있을까. 후세 사람들이 강유를 기려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강유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정의로움이라고 믿었기에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오늘도 그의 이름이 회자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