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당신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 승인 200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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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해무-15
“미안합니다. 내가 좀 취해서.”
“빨리 꺼져. 그렇지 않으면 정식으로 입건하겠어.”
내 엄포에 고정근은 무릎을 툭툭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비틀거리며 마을 쪽으로 내려갔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신임 지서장의 기를 꺾어놓기 위해 일부러 그런 행동을 보였던 것을. 하지만 그가 그런 행동을 보인 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전 전 지서장인 한주임과 농촌지도소 분소장, 그리고 자신이 벌인 잊지 못할 해프닝 때문이었다. 아니,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사건 때문이었다. 그것은 지서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보건소 ×× 지소와 관계가 있었다. 즉 보건소 지소장으로 부임해 온 미스신으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미묘해졌던 것이다.
당시 신임 보건소 지소장 미스신은 30세의 노처녀였고, 분소장과 지도장 고정근도 각각 33세의 노총각이었다. 그래서 미스신이 출장소장으로 부임하자마자 두 사람은 총각 딱지를 떼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니까 농촌지도소 분소장은 매일 같이 출장소를 찾아가 아프지도 않은 몸을 보아달라며 애원했고, 고정근은 틈만 나면 미스신에게 선물을 보내며 애정 공세를 펼쳤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지서장인 한주임이었다. 한주임은 처자식이 엄연히 있었지만, 섬 근무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장난 반 농담 반으로 미스신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런데 그만 미스신이 한주임에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한주임의 물건을 포경 수술해 주고 나서. 직원들 말에 의하면, 한주임은 물건이 독특하게 생겨서 어떤 여자든 그걸 보면 꼼짝 못하고 몸을 내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스신이 한주임의 물건을 보는 것은 물론이고, 포경 수술까지 해줬으니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무튼 미스신에게 목숨을 걸었던 고정근과 분소장은 닭 쫓던 개 지붕 바라보는 격이 되었다. 더구나 고정근은 미스신이 자신에게 시집을 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니 그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 일이 있은 후, 고정근은 술로 나날을 보냈다. 미스신을 건드린 한주임을 원망하며. 하지만 한주임은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임기를 마치고 뭍으로 나갔고, 그 몇 달 후 미스신도 도시로 발령이 났다. 그러니 고정근이 지서 주임들에게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왜 이렇게 취한 거예요?”
고정근이 마을 쪽으로 내려가자 누군가가 그를 부축했다. 마치 그의 부인이라도 되는 듯이. 나는 잠시 어둠 속으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음성이기 때문이었다.
“어머, 피가 나잖아.”
그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비치다방 미스정이었다. 나는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돌하고 자존심 강한 아가씨가 고정근에게 마음을 주다니. 아니, 망나니 고정근에게 자신을 허락하다니. 내 생각은 적중했다. 미스정은 고정근의 무릎과 엉덩이에 묻어 있는 흙을 털어냈다. 그리고는 지서 쪽을 원망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돌담 뒤로 허둥지둥 몸을 숨겼다. 그러나 미스정의 눈을 피하기에는 내 동작이 너무 느리고 굼떴다. 나와 그녀는 잠시 어색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미스정의 표정이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니, 아주 간절하고 애절한 눈빛으로 서서히 변해갔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연모와 갈망의 눈빛이었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서도 그녀의 눈은 똑똑히 보였다. 그녀는 내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당신이 왔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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