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넝쿨장미-40
“난 선배만 믿고 있을게요.”
차지연은 말을 하고 나서 밝게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 한 구석에서는 불안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났다. 우리의 사랑 자체가 불완전하고 위험한 토대 위에서 싹을 틔우고 있었으니까. 더구나 우리는 현직 경찰관이었다. 사회의 공공질서를 지키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그런 사람들이 질서를 깨뜨리고, 드러내 놓고 현행법을 위반하고 있었다. 그것도 재야인사를 감시한다고 따라다니면서. 차지연이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내일부터는 한 사람만 나오는 게 어때요?”
“한 사람만 나오다니?” “그러니까 오전 시간에 한 명만 나오자는 얘기죠.”
“그러면 다른 사람은?” “집에서 쉬다가 오후에 나오면 되죠.” “계장이 알면 큰일 날 텐데.” “우리 둘이 약속한 건데 누가 알겠어요?”
“하긴 그렇지. 그러면 지연이 오후에 나와 내가 오전을 책임질 테니까.”
“좋아요. 그러면 오후는 내가 맡을 게요.” “생각해 보니 좋은 방법이다.” 내 말에 차지연은 당연하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당돌한 방법을 거침없이 생각해 내는 차지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기보다는 당차고 겁 없는 여자애라는 생각을 하며. 아니, 어쩌면 그녀는 무섭고 두려운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삶과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지도 모르는.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애써 감추며 담배를 비벼 껐다.
우리는 다음 날부터 근무 체계를 바꾸었다. 즉 나는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지부장 집 앞으로 나가서 감시를 시작했고, 차지연은 오후 두시 쯤 지부 앞으로 나왔다. 물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거나, 특별한 지시가 하달되면 둘이 만나 대책을 논의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부장이 돌발적 행동을 할 때는 비상 연락망을 가동해 움직이기로 했다. 아무튼 나는 지부장의 허름한 양옥집 앞으로 근무처를 옮겼다. 그리고 승용차 안에서 지부장이 출근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묘한 것은 지부장의 집 담장에도 넝쿨장미가 피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붉디붉은 넝쿨장미가. 나는 넝쿨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당장 밑에서 졸음을 참으며 지부장을 기다렸다. 마치 그를 놓치면 나라가 위기에 처할 것 같은 불안을 느끼며. 나의 뒤숭숭하면서도 불안한 아침은 그 여름이 다 가도록 넝쿨장미의 향기 속에서 시작되고 또 끝이 났다. 다시 말하면 나는 넝쿨장미의 잔인하도록 매혹적인 향기를 맡으며 차지연과 유키코, 그리고 정소희와의 관계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상처를 주지 않고 일을 수습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아니, 내 앞날은 어떻게 전개될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다.

“최경사 나 좀 보자구.”
감찰주임이 나를 보자고 한 건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서였다. 그때 지청에서는 전교조 지부에 대한 감시를 풀었다. 그래서 나는 3계로 복귀해 정상적인 대공업무를 보고 있었다. 물론 차지연도 다시 대공과 내근으로 들어왔다가 민원실로 발령을 받았다. 그것도 다른 직원들이 다 기피하는 민원실로. 그것은 그녀의 신청에 의한 것이었는데, 어떤 면에서는 잘된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차지연은 임신한 사실을 숨기느라고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더구나 차지연은 내게 매일처럼 이혼을 강요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유키코에게 말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