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밀대 등 곳곳마다 정겨움이
 평양은 아직도 정말 들어가기 힘든 곳이다. 북한의 공식 초청을 받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인천일보 취재팀(4명)은 지난 11월 7일∼12일까지 지역신문발전위원회 후원을 받아 평양과 묘향산을 취재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방북 과정이 너무 극적이었다.
 전국 일간지중 최초의 방북취재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아니더라도 설레는 마음으로 취재팀이 경유지인 북경으로 향한 것은 지난달 6일. 오후3시 북경공항을 빠져나옴과 동시에 북한영사관을 찾았다. 입북에 필요한 비자(사증)를 서둘러 받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웬걸. 북한영사관에서는 아직 비자가 떨어지지 않았단다. 허탈한 마음에 어찌 할 바를 모르는 일행에게 북한 영사부장이라는 사람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오늘은 틀렸으니 내일 오전 일찍 와보라”며 사무실 안으로 쑥 사라져 버린다. 하늘이 캄캄하다. 뭐가 잘못된 걸까? 불안한 마음으로 영사관을 나온 일행은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서로 침묵이다. 가이드를 통해 중간중간 북한영사관에 전화를 걸었으나 ‘아직 않됐다’는 대답뿐이다. 밥이 넘어가질 않는다. 힘없이 호텔로 향해 일찍 잠에 들었다.
 밤새 뒤척이다 급한 마음에 오전 7시30분 다시 북한 영사관을 찾았다. 물론 아침도 굶었다. 굳게 잠긴 문을 한참 두드린 끝에 8시가 한참 지나서야 문이 빼꼼 열렸다. 그런데 답은 역시 똑같다. 아직 안됐다는….
 ‘혹시 못 들어 가는 건 아닐까. 무슨 변수가 생겼나.’ 불안한 마음에 모두 좌불안석이다.
 영사관 직원에게 ‘뭐가 잘못 됐느냐’며 따져도 소용없다. 통일부에서 내준 ‘방북취재허용증’을 꺼내보여도 소용없다. 평양행 비행시간(오전 11시 30분)은 점점 가까워 온다. 오전 9시30분. 이젠 뭔가를 결정해야 할 때다. 다른 곳을 경유해 입북해야 하나, 아니면 인천으로 돌아가야 하나. 쉽게 판단이 서질 않는다. 거의 자포자기에 빠진 순간 사무실 안쪽에서 경쾌한 전화벨이 울린다. 평양에서 드디어 우리에게 사증을 내 주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환호성이 터졌다. 다급히 신청서를 쓰고, 사진을 여기저기서 오려 붙인 끝에 드디어 사증을 손에 넣었다. 우리를 태운 봉고차량이 쏜살 같이 공항에 다다르자, 미리 연락을 취해 놓은 고려항공사 승무원이 티켓을 들고 수속대 앞에 서 있다. 이젠 됐다.
 평양행 고려항공기가 이륙하자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잠시 눈을 붙인 사이 벌써 비행기는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 있다. 입국장을 빠져 나오자 반가운 얼굴이 손을 흔들어 보인다. 박철용 선생(44)이다. 박 선생은 지난 9월 인천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때도 청년학생협력단을 이끌고 인천에 내려와 안면이 있다. 걸쭉한 입담에 여러 방면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자랑한다. 두주불사형에 성격도 화통하다.
 도착 첫날은 취재팀 숙소인 양각도 호텔에 여장을 풀고 고소한 평양맥주로 밤을 맞았다.
 다음날 사실상 첫 일정이 시작됐다. 전날까지 비가 왔던 평양 날씨는 무척 깨끗하고 맑다. 첫 취재 코스는 인민대학습당 앞쪽에 자리잡은 역사박물관이다. 전시유물 가운데 우리 중·고교때 국사책에서 본 것들이 눈에 띄어 신기했다. 신라시대 첨성대며 다보탑 모형도 전시돼 있다. 여성 안내원은 관람 중간에 편종으로 ‘나의 살던 고향’과 ‘아리랑’을 즉석에서 연주해 줬다.
 ‘천하제일강산’이라는 큼직한 현판이 달린 대동문 옆 련광정과 을밀대도 이례적으로 공개해 줬다. 이중 을밀대는 남측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졌지만 좀처럼 안내를 꺼리는 곳이다. 을밀대는 누각도 훌륭하지만 뒤편 산 기슭을 쌓아 올린 수십m의 돌담이 단연 압권이다. 을밀대는 사면이 확 트였다 해서 ‘사오정’으로도 불린다는 게 안내원 설명이다.
 평양단고기집에서 배를 채운 일행은 예술영재학교로 이름난 금성학원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이미 인천을 다녀간 경험 까닭인지 우리를 더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저녁무렵 찾아간 만수대창작사에서는 북한에서 첫 손에 꼽는 유명화가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그림이 복잡하건 단순하건 들어가는 정성은 똑같다’라며 ‘혼예술’을 강조하는 김승희 여성화백과 선우영·정창모 화백 등이 그들이다. 열평 남짓한 화실에서 하루종일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고향이 전주인 정창모 화백은 그림 한 쪽에 ‘철새는 북과 남을 자유롭게 오간다’는 글귀로 통일의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다음날은 전날과 달리 대동강변에 뿌연 안개가 끼었다. 날씨도 흐리다. 정확히 오전9시 호텔을 출발해 강동구역 거리를 한 시간 정도 지나자 단군릉이 나온다. 차창 주변은 추수가 끝나 을씨년스럽다. 단군릉은 풍수지리에 문외한이 보기에도 ‘천하명당’이라는 생각이다. 릉 앞쪽은 탁 트인 들판에 강물이 흐르고, 뒤편은 단군이 무술을 연마했다는 홍산이 병풍처럼 떡 버티고 있다. 릉 안에 있는 관은 일체 공개하지 않는다. 취재진들이 자꾸 궁금해 하자 안내원은 우스갯소리로 ‘100유로를 내면 보여 줄 수도 있다’고 제안한다. 강한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촬영은 절대 금물’이라는 통에 포기하고 말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동명왕릉은 주변 수만 평의 소나무 밭이 일품이다. 이중 수백여그루는 제주도에서 공수해온 것이란다. 뒤편에 있는 평강공주와 온달장군 릉도 눈길을 끈다.
 초·중학생들의 방과후 공교육기관인 만수대학생소년궁전은 그 규모가 웬만한 대학 캠퍼스보다 더 웅장하고 정갈하다. 고사리손으로 동양화를 그리거나 자수를 놓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1시간 동안 학생들의 예술공연을 보고 봉고차에 오르자, 북측 안내원들이 미리 준비한 군고구마와 군밤을 불쑥 내민다. 마침 배도 촐촐했지만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사실상 취재 마지막날인 11일은 묘향산을 가기 위해 새벽부터 서둘렀다. 이날따라 짙은 안개가 평양시내를 감싸고 있다. 걱정이 앞섰지만 평양시내를 빠져 나가자 거짓말처럼 안개가 서서히 걷힌다. 묘향산은 김일성부자가 세계 각지에서 받은 선물을 전시해 놓은 국제친선관람관이나 서산·사명대사를 배출한 보현사를 빼 놓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비로봉 계곡에서 먹어본 야외점심식사 역시 두고두고 잊지 못할 순간이다. 향산호텔에서 준비한 소·오리고기를 숯불에 구워먹는 맛은 어디에도 비할 바 아니었다. 묘향산밖에 나지 않는다는 돌버섯의 쫄깃쫄깃한 맛이며, 산에서 직접 캔 도라지 나물은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오후 늦게 평양에 돌아온 취재팀은 그동안 정든 북한 안내원 선생들과 작별의 아쉬움을 달래며 호텔 로비에 있는 술집에서 맥주잔을 한없이 기울였다. 또 만납시다.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평양취재단=백종환, 남창섭, 노경신, 이주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