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실업야구계에 파란이 일어났다.
 전국실업야구선수권대회가 사회인야구팀에도 문을 연 첫 대회에서 사회인야구팀인 ‘제일유리’가 8강 경기에서 만난 실업야구 강자 포스틸에 역전승, 4강에 진출한 것이다. 당시 한 언론은 이날의 이변을 ‘강철 뚫은 유리’라고까지 표현했다.
 경기만 하며 매번 져 출전에 의미를 뒀던 순수 동호인 야구팀이 어떻게 실업최강팀을 무찌를 수 있었을까. 야구 글러브 대신 목장갑을 끼고, 방망이 대신 판유리를 든 프로야구 선수 출신 장정기(48) 전무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인천고를 졸업하고 1977년 인하대 야구부 창단 멤버로 들어간 그는 한국전력에서 1년을 뛰다, 인천연고 프로야구팀으로 창단한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 유격수와 지명타자로 활동했다.
 시원치 않았던 팀의 성적도 그러려니와, 83년 걸린 허리디스크로 85년 삼미가 청보 핀토스로 이름을 바꿀 때 야구복을 벗었다.
 선수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야구에 대한 미련은 그대로 남아있어, 그는 곧바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위해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그러다 부친이 인천에 창업, 형제들이 운영하고 있는 제일유리에 입사했고, 그 때부터 그는 제2의 야구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이 회사 야구동호인 모임은 시합만 나가면 매번 지는 팀이었다. 장 전무의 승부욕이 이 때 발동한다. 야구를 그만둔 선수를 하나둘 데려오면서 야구팀은 환골탈퇴한다. 여기에 회사차원에서 야구팀을 전폭적으로 지원, 100억원 매출에 1억원에 달하는 지원비를 내놓았다.
 승승장구, 지칠줄 모르던 이들의 질주는 95년·96년 사회인야구대회 평정에 이어, 이듬해 실업야구까지 넘보게 된다. 이 회사 야구팀에 소속된 직원이 프로야구팀으로 스카웃되기에 이르렀고, 2002년 전국체전에는 대전 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다.
 직원들의 사기와 야구로 다져진 화합은 곧바로 매출신장으로 이어졌고, 국내 최초로 2002년 벽걸이 TV의 PDP 필토유리를 국산화하는데 성공하는 등 제일유리는 산업용 유리업계의 선두주자로 발돋움했다.
 회사의 성장과 함께 직원들도 바빠졌다. 당연히 야구팀은 1주일에 한차례도 모이기 힘들어졌다. 매출이 아무리 늘었다고 해도 직원 동호회 차원의 야구부에 1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지원금을 쓰기엔 중소기업으로서 부담이컸다. ‘사회인 야구’의 절대 강자 제일유리 팀은 2003년 그렇게 해체됐다.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스포츠 신문이나, 일간지는 물론, 사회저변에서 실업야구와 사회인 야구에 대한 관심이 높았죠.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장 전무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김주희기자 (블로그)kimjuh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