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항일운동사 (7)3.1 만세운동-인천보통학교서 첫 외침
               (7)3.1 만세운동
                             -인천공립보통학교서 첫 외침
 
 1919년 3월8일 오후 9시. 야음을 틈타 4명의 젊은이들이 우각동(牛角洞)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 당시 4년제)에 나타났다. 이 학교 상급생인 김명진과 이만용, 박철준 등의 손에는 전선 절단용 가위가 들려있었다. 학교 2층으로 올라간 이들은 전화선을 자르고 전화기를 박살낸다.
 
 1919년 2월28일 순종은 이미 같은달 22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인한 한일병합 문서에 따른 ‘양국’(讓國)의 조칙을 내렸다. 이 조약 제1조는 ‘한국정부에 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제에 양여할 것을 규정했다. 519년간 이어온 조선왕조가 끝나는 순간이다.
 다음날인 3월1일 오후 2시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 모여(4명 불참) 미리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곧바로 일경에 체포된다. 고종의 인산(因山·임금의 장례)을 애도하기 위해 파고다 공원에 모인 수많은 시민들은 순식간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대로 변했다.
 그로부터 5일 후 인천에서도 ‘다수의 관민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어 시위는 시작’된 것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 교민단체 ‘국민회의’ 기관지인 신한민보 1919년 4월29일자 내지독립단의 소식(인천)이 전하고 있다.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조사된 인천지역의 첫 독립만세운동지는 인천공립보통학교다.
 신한민보에 실린 같은 기사는 ‘6일에는 보통학교 학생들이 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 학생과 더불어 전부가 회합하고 8일에는 다수가 독립선언서와 홍보름을 날리…(이하 판독 불능)’로 이어진다.
 공립보통학교 3·4학년생들로 주축이 돼 동맹휴업에 들어간 날은 6일. 그로부터 4일간 학생들은 등교를 거부했다.
 이에 따라 일경은 학생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사전에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교직원들에게 정보보고를 요구한 것. 동맹휴업을 주도한 김진명 등이 전화선을 자르고 전화기를 부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일로 김진명(당시 18세·11회 졸업)은 ‘수화기 횡령’이란 죄명으로 1심에서 실형 2년을 선고받고 1년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이만용(18세·10회)과 박철준(19세·11회)은 태형 90대, 손창신(16세·11회)은 무죄 판결받았다.
 6일 벌어진 시위로 일경은 학생들의 동태를 파악하는 한편 학교 교직원도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적극 만류하기에 이른다.
 일제가 대한매일신보를 사들여 발행한 한국어신문인 ‘매일신보’ 1919년 3월11일자 기사에서 ‘보통학교 3·4학년 학생들이 하급생들의 등교를 방해하고, 협박했다’고 전한다.
 이 기사는 ‘경찰이 이에 엄중히 조사하고, 일면으로 학교 직원들이 가정을 방문해 학교 출석을 권유했다‘며 ‘수업을 개시했으나 3·4학년 학생들은 결석했고, 다수의 (독립)선언서가 배포돼 조사 중’이라고 이어진다. 이 일의 책임을 물어 일제는 보통학교의 정원을 남·녀 417명에서 345명으로 줄인다.
 인천공립보통학교에서 시작한 동맹휴업과 만세운동은 인천 전역으로 번져 7일부터 만세행렬이 일어나기 시작, 8일에는 시내 각지에 독립선언서가 다수 배포됐다.
 보통학교 학생들과 1차 시가 행진을 벌인 바 있는 인천공립상업학교 학생들의 움직임도 계속됐다. 인천고 100년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졸업반 학생 40여명은 돌립선언서를 부내(인천부)에 배포하고, 인천내리교회와 성공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가두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공립상업학교 학생들은 학교당국의 만류와 경찰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17일 오전 9시30분 재차 강당에 모여 ‘대한독립’ 만세 소리를 드높이며 가두진출을 시도했으나, 교문 밖에서 경계중이던 경찰에 봉쇄당하고, 주동자 17명이 체포됐다.
 당시 일본인 교장은 직권으로 휴교령을 내리고 학생들에게 귀향을 종용했다. 일부 학생은 강화 등지로 피신했으나 수 명이 잡혀 3개월형을 받았다. 이로인해 이 학교 7회 졸업생들은 졸업식을 하지 못했다.
 이에 앞서 9일 오후 5시30분 기독교도와 청년학생 300여명이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모여 시위를 벌이려다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됐다. 이들은 오후 8시30분쯤 자리를 옮겨 시위를 벌였다.
 3월12일자 매일신문은 ‘9일 오후 8시30분에 경성가도(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동쪽 길)에서 약 50명이 모여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운동을 시작하였고’라 전한다. 이 시위로 주모자 한명을 체포됐다.
 10일에는 시내 중심가에서 시민과 학생 200여명이 만세시위를 감행했다. 이 때 8명이 붙잡혔다.
 영화여고 100년사에 기록된 당시 영화여학교(1892년 설립·현 영화여자정보고) 안인애 교사 일화는 당시 만세운동에 따른 일제의 감시가 얼마나 서슬퍼랬는지 잘 증명한다.
 안 교사는 서울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난다는 연락을 받고(날짜는 정확하지 않다), 경인선을 타고 서울에 도착해 이화여고 차사백 교사로부터 독립선언문과 전단을 잔뜩 받는다. 이를 가방에 넣고 인천역에 도착한 안 교사는 일본 헌병에 불심검문 당하지만 고장이 나 가방을 열 수 없었다. 무사히 플랫폼을 빠져나왔지만 안 교사는 학교로 가지 않고 고향으로 가 독립선언서를 집집마다 뿌렸다.
 보통학교에서 시작, 학생과 기독교인들의 주도해 벌어진 인천의 만세운동기간 동안, 개항장 주변 조선인 상점은 문을 닫는 것으로 만세운동에 동참했다. 인천공립보통학교 만세운동 소식을 전한 11일자 매일신보는 같은 면에 ‘경성시내 상사가 대부분 철시했고, 전차 운전수들이 파업을 벌였다’는 소식을 전하며 ‘협박에 의한 철시’라 폄훼하는 기사를 냈다.
 인천에서는 3월27일 각 상점에 비밀리에 ‘조선독립신문’과 격문이 날아들었다. 연일 만세시위가 전국은 물론 인천에서 벌어지는 등 민심이 고무된 상황이라 조선인 상점들도 철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경찰이 개점을 종용하고 협박했으나 그 때일 뿐, 상인들은 눈가림으로 문을 열었다 다시 닫아버리면서 항쟁을 계속했다.
 3·1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5월30일까지 이어졌다. 이 기간 집회는 1천542건, 참가 인원이 202만3천98명이었다. 이 중 4만6천948명이 체포됐고, 2만3천470명이 죽거나 다쳤다.
 개항장인 인천에서 한달간 벌어진 만세운동은 공식적으로 8건이다. 9천여명이 참가했고, 이 중 15명이 체포됐다.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붙인 만세의 불길은 부평(13일), 황어장터(24일)로 번졌다. 이어 규모면에서 전국에서 최대(2만명)인 시위가 강화(18일)에서 일어난다. /김주희기자 blog.itimes.co.kr/kimjuh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