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늙어 무슨 소원이 있겠냐만, 어렵겠지만 부모님의 고향인 황해도 곡성이나 서울에 살고 있는 친척을 만나고 싶다.”
 러시아 한인이주 140주년을 맞아 기념관 건립사업을 벌이고 있는 동북아평화연대(공동대표·이부영) 등 시민사회단체들 주관으로 지난 9일 인천종합문예회관에서 열린 ‘연해주 길마중’ 공연에서 고려인 할아버지 악사로 출연한 김 알렉산드르(한국명 김인근·73)씨의 희망이다.
 김씨는 1931년 12월30일 연해주 올긴스끼에서 황해도 곡성 출신인 아버지 김관해씨와 서울이 고향인 어머니 정관식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가난과 폭정에 못 이긴 조선인들은 고향을 떠나 연해주로 정처없이 흘러들었고, 땅을 일구며 새로운 삶을 만들어갔다.
 “부모님들은 조선과 연해주를 오가며 장사를 했다. 그러다 1920년인가, 열려있던 국경이 막히면서 부모님 모두 조선으로 나오지 못했고 어쩔 수 없이 연해주에 정착해 살다 결혼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다른 고려인들과 함께 김씨의 가족도 1937년 8월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다. 스탈린 정권이 일본의 간첩행위가 극동지방에 침투하는 것을 막겠다며 편 고려인 이주정책 때문이다.
 “여섯살이었지만 기억이 난다. 그 때 집에 소가 4마리, 말이 한필 있었다. 옥수수, 콩, 밀 농사도 잘됐다.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날 때 다 놓고 갔다. 러시아 정부는 ‘수확한 곡식을 모두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저버렸다. 다른 지역에서는 말을 듣지 않는다며 마구 때리고 총까지 쐈다는 소문도 들었다.”
 이주 열차는 화물칸을 개조해 만들었다. 한달 넘게 70명이 넘는 사람들이 열차 한 칸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떨어야 했다. 죽어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나마 도착한 우즈베키스탄 등 정착지에는 까레이스키들에게 또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홉살때 전쟁이 났지. 먹을게 없어 풀을 뜯어먹고 살았다. 일을 하려 해도 배가 고파 잘 하지 못했다. 일하다 죽는 사람도 있었다.”
 김씨의 어머니는 우즈베키스탄으로 옮긴지 1년만에, 그의 아버지는 그 다음해 운명을 달리했다. 어린 김씨는 열한살 많은 형의 손에 이끌려 자랐다.
 전쟁이 끝나면서 사정이 좋아졌다. 스탈린 정부가 세금도 없애고, 물가도 내렸다.
 풀 한포기 자라기 힘든 척박한 땅에서 벼가 자라기 시작했다. 구 소련이 자랑하던 최고의 콜호즈 집단농장이 바로 까레이스키들의 작품이다.
 그러나 고려인들의 유랑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20세기 말 소련의 붕괴로 연방에 속했던 중앙아시아의 민족들이 독립을 선언했고, 다른 민족이란 이유로 고려인들은 배척당했다. 갖고 있던 재산을 헐값에 처분하고, 국적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고려인들은 또다시 유랑길에 오른다.
 장성한 김씨는 결혼해 딸아이를 얻은 뒤 1956년 연해주로 되돌아왔다. 농사도 짓고, 자동차도 운전하며 세아이의 아버지로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키운 큰아들은 무역업을 하며 한국을 오가고 있고, 작은 아들은 건축업을 한다. 지난 96년에는 큰아들을 따라 부산에 온 적이 있다고 김씨는 말했다.
 김씨는 연해주 고려인 3∼4세들로 구성된 ‘아리랑 예술단’과 러시아 민속 무용단 ‘라두가’, 극단 ‘연극마을’, 풍물패 ‘누리’ 등이 함께 만든 총체극 ‘연해주 길마중’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한다. 그가 부른 노래는 ‘제비’. 고향 생각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노래다.
 지난 11일과 13일 의정부와 대구에서 공연한데 이어, 오는 15일과 20일에는 안산과 춘천에서도 관객과 만난다.
 한편 러시아 한인이주 140주년 기념관은 러시아 프리모르스키(연해주) 우스리스크시에 3천평 규모로 들어서게 된다. 오는 26일 기공식을 치를 예정이며, 40억원의 민간모금을 통해 올 연말 문을 열게 된다. /글·사진=김주희기자 kimjuhee@incheo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