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경순 숭의여대 교수, 한국무용가>
 지난 2000년 8월, 한 권의 책이 한국무용계는 물론 문화예술 및 학계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그러더니 그 해 모 중앙언론사 선정 ‘올해의 책’으로 선정돼 진가를 공인받았던 책 ‘조선궁중무용-국악정재무도홀기(열화당 刊)’. 원형대로 재현되지 못하고 재안무를 통해 무대화하는데 그쳤던 우리 고유의 궁중무용을 가장 충실하게 재현해낼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한 첫 자료로, 발간당시 큰 주목을 받았다. 책은 현재 한국무용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의 교과서로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정재(呈才)라 일컫는 궁중무용은 조선왕조실록, 악학궤범, 고려사악지 등에 그 홀기, 즉 무보(舞譜)가 수록돼 있어요. 그러나 그동안 국역본이 없어, 홀기대로 추어지지 못하고 가인전목단·검무·무고·춘앵전 등 일 부분만이 정재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올랐지요. 한국무용가로서 궁중무용을 홀기대로 추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컸고, 후학들이 관련 자료를 요구할 때면 정재 재현작업의 과정을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도 많았죠.”
 숭의여자대학 한국전통무용과 손경순 교수(48·☎02-3708-9128)가 궁중무용 대가인 스승 이흥구(중요무형문화재 제40호 학연화대합설무 기능보유자)씨와 함께 ‘정재홀기 국역’이라는 대 역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다. 한자 고어가 많은데다 춤 분야에서만 쓰던 전문용어가 가득한 정재홀기를 우리 말로 풀어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3년여 산고끝에 2000년 나온 첫 권(계사본 각정재무도홀기 국역본)에는 봉래의, 몽금척, 경풍고, 육화대 등 38종의 정재가 도면과 함께 상세히 실려 실제 공연하는 이들이 원형에 가깝게 재현해낼 수 있도록 했다.
 “국역도 힘겨웠지만, 소위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책을 만들어내지 않으려는 출판사들을 설득하랴, 젊은 무용인들이 쉽게 책을 이해할 수 있도록 연구하랴, 출간까지 과정이 참 힘들었어요.”
 손 교수는 스승과 함께 올해중 그 두번째 책을 낸다. 악학궤범에 실린 정재홀기 국역본이다. 산고의 고통을 잊고 또 다시 자식을 낳는 어머니처럼, 첫 권 발간의 피로함을 뒤로 한 채 작업에 또다시 매달려 얻어낸 귀한 결실이다. “시대가 달라졌는데 원형을 굳이 똑같이 살려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사람도 있겠죠. 그러나 원형을 알고 있어야 그를 토대로 창작도, 현대에 걸맞게 재현도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재홀기 국역작업은 제 남은 생을 다 바쳐야 할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
 한국무용계 수많은 명인들이 뜨고 졌어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내, 우리 춤을 이어갈 후학들의 좋은 길라잡이를 남긴 손 교수. 그는 사실 가장 바쁘게 현장에서 뛰는, 실력있는 중견무용가중 한 사람이다. 7살에 무용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40여년을 오로지 춤과 함께 했다. 더 중요한 것은 여전히 몸과 정신을 무장한 채 무대에 서는 현역 무용인이라는 점. 제자를 지도하고, 무용단(예전무용단)을 이끌며 연 평균 1회 개인발표회는 물론 수많은 공연을 통해 관객앞에 섬으로써 늘 긴장하며 새롭게 배워나가는 부지런한 무용가로 통한다.
 “제자들과 새벽 연습을 거른 적이 없어요. 새벽 연습은 수십년된 습관입니다. 학교에서 제 별명은 악바리예요. 내가 먼저 땀흘리며 터득해야 제자를 제대로 키울 수 있지요. 잘못 나가는 제자에게는 매도 듭니다. 음악과 자신의 감정에 심취해 춤을 추고 난 뒤의 땀은 여느 땀과 다릅니다.”
 ‘198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이수자로 선정되기까지 작고한 인간문화재 한영숙 선생의 남다른 총애를 받으며 대가 밑에서 탄탄한 춤의 기초를 다졌다. 96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0호 학연화대합설무의 전수교육보조자로 선정된 그는 민속무용외에도 궁중무용의 학습과 전승에 남다른 공을 기울이고 있다. 전통춤 공연무대로 93년 뉴욕에서 첫 개인발표회를 가진 이래 거의 매해 워싱턴을 중심으로 해외공연을 갖고 있으며, 다양한 레퍼토리와 깔끔하고 우아한 의상·소품으로 교포와 외국인에게 한국전통춤의 아름다움을 알리는데 남다른 성과를 얻고 있다. 그는 또 지난 20여년간 모 문화센터의 전통춤 강습 프로그램에 공을 들여 현재 20개가 넘는 강좌를 운영, 한국무용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한 춤 전문지에 실린 평론가의 평은 그가 어떤 무용인인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런 다채로운 경력, 예술가로서의 열정으로 그는 재즈 그룹 유라시안 에코즈 등 타 장르와의 합동공연, 88서울올림픽 폐회식 합동안무, 서울 국악관현악단과 협연, 미국 케네디센터 공연, 포항공대 초청공연 등 여느 전통무용인으로서는 갖기 어려운 이력도 소유하고 있다.
 그는 70년대초 인천여고, 아니 인천을 대표하는 빛나는 학생 무용가였다. 전국 규모 무용대회 최우수상을 셀 수 없이 휩쓸어 지역내외에서 명성이 자자했고, 대학에 진학해서도 장학금으로, 아르바이트로 학비·생활비를 벌어가며 오로지 춤추기에 열정을 바친 춤꾼이었다. ‘무용하는 얘들은 머리가 비었다’는 비아냥이 싫어 새벽등교해 공부한 끝에 여고에서 전교1등을 차지, 그 자신도 놀라게 만들었던 오기와 집념.
 춤에 대한 그 열정은 여전하지만, 지천명을 앞둔 그는 넉넉한 심성과 질그릇같은 토속미를 갖고 있었다. 안동 권씨 집안의 대소사를 야무지게 챙기는 며느리로, 가정을 푸근하게 만드는 어머니와 아내로, 외국에 입양된 한국인 자녀 300여명에게 명절마다 선물을 보내주는 봉사자로, 수많은 제자와 그 남편들까지 수시로 드나들 만큼 따뜻한 교수님으로 살아가는 얘기를 전해들으며 가진 느낌이다.
 “이흥구선생께서 학연화대합설무 무형문화재 신청을 하라고 몇차례 권하셨지만 거절했어요. 인간문화재가 되기에는 미숙한데다 그 한가지 문화재종목에 매이기 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요. 60세이후에는 정재홀기 국역, 창작 등에 전념할 생각입니다. 외국공연을 하면 우리 것에 대한 열광과 호응이 대단합니다. 우리가 외국에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전통문화밖에 없어요.” <손미경 기자> mimi@incheo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