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서울의 한해 행사를 적은 열양세시기에 떡국을 먹는 풍습이 기록되고 있다. 『방아로 쌀가루를 내어 시루에 찐 다음 안반에 쏟아 떡메로 친다. 떡이 되면 손으로 비벼 둥글고 길게 늘인다. 먼저 장국을 끓여 국물이 펄펄 끓을때 떡을 마치 돈 모양으로 썰었다가 국속에 넣는다. 끈적거리거나 부서지지 않는 것이 잘된 떡국이다.』

 그러나 지금은 방앗간이 있어서 편하다. 가루를 내줄뿐 아니라 떡도 만들어 주므로 기계떡이라고 했는데 최근엔 아예 가게에서 썰어 팔기까지 한다. 전에는 떡이 굳으면 썰기도 큰일이었다. 한석봉의 떡장수 어머니의 떡 써는 솜씨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예전 설에는 떡국이 절식이어서 차례상에 메 대신 떡국을 올리고 식구대로 한그릇씩 먹으며 세배오는 손님에게도 떡국으로 대접했다. 이처럼 설날 세찬으로는 떡국이 제일로 꼽혔다. 그래서 나이를 물을때 『떡국을 몇그릇이나 먹었냐』고 은유적으로 물었다. 그리고 떡국을 먹음으로써 나이도 늘고 점차로 일하는 솜씨도 능숙하게 되므로 『떡국이 농간한다』는 속담이 생겼다. 대궐이나 민가에 이르기까지 상하 고루 먹는 떡국이기 때문에 섣달 그믐이면 방아찧는 소리가 집집마다 요란했다. 그러니 살림이 곤궁하여 방앗소리도 못낸다면 그처럼 처량할 수가 없었다. 신라때 백결선생이 거문고 소리로 방앗소리를 대신했다 함은 모두가 잘 아는 고사이다.

 나라에서도 연말의 구휼이 큰 걱정이었다. 왕조실록 곳곳에 백성들의 떡국을 걱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눈속에서 얼어죽지 않도록 대책을 미리 세워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음해의 큰 사발의 떡국이 소용없다는 내용이 곳곳에 보이며 정조 임금도 연말이 닥쳤는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어영청 군사들에게 양식을 주어 부모처자와 함께 새해에 떡국을 배불리 먹게 하라고 전교를 내리고 있다.

 떡이면 떡, 국이면 국으로 족한 것을 굳이 떡국으로 즐긴 것을 보면 넉넉지 못한 형편에도 우리 옛어른들은 살림의 지혜가 여유로웠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라지만 엊그제 설날에 모두들 떡국을 드셨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