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가 ‘블록버스터’라면, 충무로는 ‘멜로’이다.
 전자가 액션 위주의 블록버스터라면, 후자는 적어도 코미디가 대세가 되어 버린 바로 몇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렇다는 얘기다.
 1960년대 ‘미워도 다시 한번’, 1970년대 ‘별들의 고향’ ‘겨울여자’, 1980년대 ‘깊고 푸른 밤’, 1990년대 ‘경마장 가는 길’ ‘너에게 나를 보낸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저 유구한 한국영화의 제목들을 반추할 때, ‘한국영화는 가히 멜로의 역사’라고 해도 과장된 표현은 아닐 것이다.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씨처럼 가벼워진 코미디가 요 몇년새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오르 내리고 있기는 하지만, ‘멜로’의 영역에 정식으로 도전장을 던지기엔 아직 힘이 붙이지 않을까.
 ‘멜로’엔 그러나 안타깝게도 ‘통속성’이란 단어가 따라 붙곤 한다. 있는 눈물, 없는 콧물 찔찔 짜내는 값싼 감상주의적 함의를 품고 있는 ‘통속성’엔 부정적이고 격멸적인 뉘앙스가 뭍어 있다.
 그러나 이제 ‘한국 멜로=통속극’이란 시각을 조정해야 할 것 같다. 한마디로 통속성을 뛰어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며 새로운 이름을 붙여야 할지도 모르는 장르를 개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지난달 28일 개봉한 ‘국화꽃 향기’를 보자. 늦깍이 신예 이정욱 감독이 장진영·박해일과 함께 만든 이 영화는 어렵사리 사랑을 이뤘지만 결국 불치병에 걸려 연하의 남편과 갓난아이를 남겨 놓은 채 여자만 세상을 떠난다는 스토리이다.
 보다시피 스토리라인은 상당히 통속적이다. 그러나 인하 역의 박해일은 인물 내면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폭풍우를 머금은 먹구름처럼 ‘글루미’한 모습으로 관객의 가슴을 적셔온다. 장진영 역시 대표적 최루성 멜로물 ‘편지’(97)의 최진실이나 ‘약속’(98)의 전도연이 내뿜었던 격정적 모습과는 딴 판이다. 이감독이 “약속과 8월의 크리스마스 중간정도로 만들 생각”이었다고 말한 건 ‘소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은’ 것이 아닌 의도된 연출임을 명백히 반증한다.
 ‘클래식’(감독·곽재용)은 또 어떤가. 이 영화 역시 ‘해피앤딩’이란, 지극히 상투적 결말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순간 ‘의표’를 찌르고 만다. ‘멜로’엔 ‘금기’라고까지 할 수 있는 학생시위 베트남전쟁 등 1960년말∼1970년초 격동의 한국사를 필름에 담아낸 것이다. 곽감독은 개인사와 시대사를 결합시킴으로써 개인의 문제는 시대·사회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오아시스’(감독·이창동)까지 들어가 보면 그야말로 ‘점입가경’이 아닐 수 없다. 정박아와 정신지체아, 이 사회적 소외 인물들의 사랑이 스크린을 장악할 수 있다고 어느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여기에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는 70대 노인들의 성과 사랑을 다큐멘터리적 극화로 사회성을 ‘멜로’에 녹였고, 김인식 감독의 ‘로드 무비’는 동성애도 일반적 사랑임을 설득력있게 웅변했으며, 유하 감독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불륜도 엄연한 사랑임을 경쾌하고 발랄하게 보여줬다.
 이 영화들의 공통분모는 통속성과 상업성을 여실히 드러내면서도 비통속성 및 작품성 또한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우리 영화의 다양성을 심각히 훼손시키면서 영화발전의 걸림돌이 돼 온 일부 멜로영화들이 이제 그 반대의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진단했다.<김진국기자> freebird@incheo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