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 진 저 늙은이 짐풀어 나를 주오/나는 젊었거니 돌이라도 무거울까/늙기도 설워라커든 짐을 조차 지실까』 노인을 위하라는 정철의 훈육시조이다. 여기에 비교하면 자전거로 달리는 내용의 동요 『저기 가는 저 노인 꼬부랑 노인/우물쭈물 하다가는 큰일 납니다』는 퍽 귀에 거슬린다.

 정철의 시대와는 무려 400여년의 차이가 있으니 긴 세월 만큼이나 인심과 정서의 차이도 벌어진 것은 어쩔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노인들이 너무나 외면당한다. 400년의 시차는 짐든 노인에게 친절을 가장해서 날치기나 했고 도심의 교통시설은 노인과 거리가 멀다. 동요의 가사처럼 자전거가 노인을 피해주는 것이 아니라 노인은 교통수단의 거추장스런 존재로 여겨진다.

 한 원로 의료인의 전언이다. 거리에서 만난 친구의 자제에게 부친의 안부를 물었더니 얼마전 교통사고로 불행을 당했다고 하더란다. 기별을 못받은 섭섭함은 다음이요 사정을 물었더니 시내버스에서 내리다 성급한 발차에 넘어지면서 뇌진탕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현재의 수준으로 시내버스는 노인기준이 아니다. 우선 무엇이 그리 급한지 승하차 하기가 바쁘게 움직인다. 노인이 차에 오르면 좌석이 있지도 않지만 좌정하기도 전에 떠나느라 자칫 넘어지기가 쉽다. 내릴 때도 미처 땅을 딛기 전에 발차 앞서와 같은 사고를 일으킬 수가 있다. 운전사 바로 뒤의 노인석도 젊은이들의 차지이다.

 요즘 용현동의 옛 버스터미널 앞 건널목을 지나면서도 같은 느낌이 든다. 웅장한 철제 육교를 세워 도시의 조화미요 행정의 치적이라도 되는듯 자랑스러워 할지 모르나 노인들에게는 한갓 불편한 존재일 뿐이다. 인근의 노인회관으로의 왕래가 많은데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서 하차 높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벅차다. 그러느라 하나로 될 것을 멀리 돌아가느라 몇개의 건널목을 건너야 할 형편이다.

 도시의 교통시설은 노인층을 감안해야 한다. 시내버스도 육교도 신호등도 그렇다. 나들이가 불편한 노인들은 천상 집지키며 젊은이들의 눈치꾸러기나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