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김 경 인

1941 인천생.

1971 서울미대 회화과 동대학원 졸업.

1962-75 국전 입선 6회.

1971-78 창작 미협전, 한일교류전(서울ㆍ일본).

1974-82 제3그룹전(문맹자 시리즈 발표).

1982 문제작가 12인전(서울미술관 기획). 인하대학교 교수부임.

1983 상파울로 비엔날레(브라질).

1985-87 아세아 국제 미술전.

1989 80년대의 형상 미술전.

1990 카뉴 국제 회화전(프랑스).

1994 제6회 이중섭 미술상 수상,인천 문예회관 개관 기념전,인천시 문화상 심사위원.

1995 광주비엔날레 조직위원, 6회 이중섭 미술상 수상기념 초대 개인전(조선일보미술관).

1997 인천 민예총 이사장, 인천 현대 미술 초대전, 현재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교수, 인미협 지도위원.근대 이후 미술의 역사는 기존의 가치와 질서에 대한 이의제기와 함께 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곤 하였다. 인상주의의 태동은 배타적 질서 속에서 자신들의 이익만을 주장하던 아카데미즘에 대한 이의제기에서 비롯되었고 미니멀리즘은 모더니즘 역사의 엄격한 제한에 대한 반동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동시대의 미술판(작가, 현장, 저널, 비평)과 그것을 다루는 미술사는 경우에 따라서 현격한 세계관의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우리의 경우를 보더라도 60, 70년대에 만연한 추상미술의 열풍은 이에 대한 적응 및 소화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무차별 유입되면서 우리의 전통 가치관의 존립기반마저 뒤흔들어 놓는 양상을 만들기도 하였다. 미술계 일각에서 제기한 「미군의 구호물자와 함께 들어온 양식」 비아냥거림도 감수성 예민한(?) 미술인들의 자성을 촉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정된 미술시장과 일자리 때문에 특정한 학맥, 유파, 또는 양식에 어긋나는 작품을 하는 작가는 가차없이 권역 밖으로 내몰리기 십상이었고 이 경우는 미술판에서의 매장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경인교수(金京仁·58)는 이런 불합리한 질서속에서도 비교적 자유롭게 작품활동을 전개해 나간다. 1974년부터 그가 발표한 「문맹자」시리즈는 그 이전까지 한국에서는 볼 수 없던 형식과 내용을 담은 그림이었다. 일단 「문맹자」라는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으나 감방같이 보이는 좁은 공간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네명의 군상들은 한결같이 관객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눈이 검은 선으로 가려져 있다. 그 중에는 훈장을 가슴에 단 자, 금목걸이를 한 자 등 한때 한가닥했던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보고 비판할 기능을 상실한 그 시대 우리들의 모습으로서 정신과 영혼은 추스르지 못하고 육신만 존재하는 허깨비같은 인간상이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무채색에 가까운 서너 가지의 색과 신문지 몇 조각으로 콜라주한 것이었지만 그 세대 지식인들에게 준 반향은 컸다.

 이러한 작품들을 가지고 김경인교수는 1981년 비교적 늦게 첫 개인전을 가졌다. 첫 번째 개인전이었지만 그는 이미 「창작 미협전」 「오늘의 작가전」 「한일교류전」 「신예작가 12인전」 「중앙미술대전」 초대작가로 이미 화단에서 중견으로 발돋움해 있었고 1974년부터 「제3의 그룹전」을 창립주도, 여기에 「문맹자」시리즈를 발표해 가며 세간에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그의 첫 개인전은 일단 규모면에서 사람들을 압도하기 충분했다.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의 2층을 꽉 메운 규모도 규모려니와 작품의 형식과 내용면에서도 보는 이를 전율케 하였다. 이는 기존 가치에 대한 이의 신청으로서 그 시대에 호흡하고 있는 자아와 주변, 예술과 현실, 그리고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서 진정한 참은 무엇인가를 일깨우게 하는 작가의 고뇌를 비교적 감별하기 쉬운 도상을 이용하여 표현한 그림들이었다. 물론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초현실주의적인 체험, 추상표현주의적 기교, 그리고 리얼리스트의 시각이 혼재한, 말하자면 현대미술의 모던한 가치도 십분 활용한 신감각의 그림이었음은 물론이다.

 대구 효성여대(1973), 상명여대(1976)로 전전하던 김경인은 1982년부터 고향 인천의 인하대학교 미술교육과로 옮겨오게 된다. 이때는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고 신군부에 의한 새로운 군사정권이 기반을 잡고 있을 때였다.

 당국은 소위 불온 작가로 김경인을 비롯한 강광(본보 98년 12월8일자 참조), 김정헌, 신경호, 임옥상, 홍성담을 지목하여 작품을 탈취하고 경고장 및 각서를 강요하며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탄압이 심해질수록 이에 대한 대응은 보다 조직적이고 일관되게 일어나고 있었다. 「현실과 발언전(80)」 「젊은 의식전(82)」 「임술년전(82)」 등 세칭 「민중미술」로 일컬어지는 80년대 리얼리즘운동의 근원은 당연히 김경인교수의 리얼리즘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시기 그의 작품세계는 「어둠의 초상」연작으로 대표된다. 「군상(83)」 「가족(83)」 「소멸(84)」 「장승(86)」 「붉은모자(86)」 「수난의 늪(90)」 등에서 드러나는 그의 은유적 리얼리즘은 존재하면서 존재를 묻는 특이한 질문에 대한 해답과 함께 미술에서 형식이 갖는 전율감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1993년 필자는 ICON갤러리에서 있었던 김경인교수의 네 번째 개인전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구관에는 그의 80년대 작품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었으며 신관에는 당시 김경인교수가 「소낭구(소나무)」 연작이 전시되었다. 필자가 그때 느낀 점은 소나무라는 소재 한가지로도 이러한 감흥과 메시지를 전달해줄 수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즉 그는 과거에는 여러 가지 모순적 현실을 용기 있게 들추어내어 공론화시키는 작업을 했다면, 「소낭구」를 통해서는 관객들에게 즉자적 감성을 억제하고 보다 냉정하게 역사와 현실을 생각케하는 차원 높은 리얼리즘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그는 한국적 리얼리즘의 방향을 제시하고 이를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작가정신은 이듬해(1994) 제6회 이중섭미술상 수상작가로 선정되면서 한국 미술계에 확연히 공인받게 된다. 경인은 1941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그가 신흥초등학교 3학년이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아버지 김영운(金永雲)선생은 식솔들을 이끌고 고향인 충남 당진으로 이주하였다. 이 때문에 당진중학교에 다니던 김경인은 미술교사 신홍휴(申鴻休)의 눈에 띈다. 김경인은 서울예고 미술과에 진학하게 되는데 당시 서울예고는 음악ㆍ미술과 통틀어 남학생이 7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예고에서도 화재를 인정받아 김경인은 이미 고3때 동창생인 장무와 함께 중앙공보관에서 수채화2인전을 열어 신문에 대서특필된 적도 있다.

 바로 국전을 포기한 김경인은 대학원을 졸업하던 이듬해(1974) 오경환, 임옥상, 민정기, 신경호, 백수남, 유인수 등을 규합하여 「제3그룹」을 결성한다. 이 전시를 통하여 그는 지속적으로 「문맹자」연작을 발표하는 한편 「창작미협전」에도 유사한 작품을 발표하여 그의 주변과 현실을 보는 시각을 명확하게 천명하고 있다. 한편 제3그룹전은 1981년 신군부에 의해 불순단체로 낙인찍혀 작품을 압수당하는 탄압을 받다가 결국 1982년 12회전을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1982년 인하대학교 미술교육과로 부임한 김경인교수는 인천시 문화상 심사위원, 인천시 지하철 심사위원, 광주비엔날레 조직위원, 인천 민예총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지역 미술문화의 위상제고에 힘써 왔으며 현재 인미협지도위원으로 이 지역 후배들의 창작활동을 조언하고 방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젤에 걸려있는 그리다 만 그림들은 새로운 작업에 대한 그의 고뇌를 충분히 대변하고 있었다.

〈이경모ㆍ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