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요양원에 「주워온 아이」라는 정신질환 소녀가 있다. 외모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정상인으로 보이나 늘 자신은 다리밑에서 주워다 키운 아이라는 피해망상증에 시달리고 있단다. 보호자의 이야기로는 어려서 어른들의 「배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놀림에 병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어른들은 자녀에게 해서는 안좋을 실없는 말을 할때가 있다. 바로 「다리밑에서 주워온 아이」라는 놀림으로 이것이 어린것에게는 충격일수가 있다. 혹 자녀들이 출생의 비밀을 물어 답하기 곤란할때 암시적으로 털어놓는데 하긴 「다리밑」은 곧 다리 사이의 출산의 위치이니 동음어를 통한 성교육일수도 있겠다. 서양의 경우는 이럴때 「배추밭에서 주워 왔다」고 한다고 한다. 역시 유감적(類感的)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실제의 「주워온 아이」 「버려진 아이」가 많다. 시설원에도 그렇고 최근 각성의 눈을 뜨고 있는 해외입양아 문제도 그렇다. 이들은 거의가 양친과의 사별이 아닌 생이별의 경우이다. 예전에는 대개 자식없는 집에 이름과 생시를 적은 쪽지와 함께 디밀었는데 지금은 완전한 기아(棄兒)이다. 여관방이나 병원에서 출산후 도주하거나 역전광장 파출소등지에 버려진다. 이들의 가는 코스는 시설원을 통해 외국에의 입양이다.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데는 물론 그만한 기막힌 사연이 있겠지만 어린것을 버리는 사정도 가지가지이다. 가정파탄으로 인해 어느쪽도 자녀부양을 마다하여 버리는 경우가 있고 불륜이나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경우도 있다. 여기에다 요즘 같은 경제난도 자식포기 구실이 된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다시 해외입양이 늘어난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평생의 불행이다. 버려지는 어린것도 부모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자녀를 버리고 인연을 끊었다고 해서 그렇다고 부모가 아니고 자식이 아닐수 없는 것이 혈연이다. 자식을 버리고 가는 어미의 발자국에는 핏물이 고인다는 옛 말도 있다.

 「한 고아의 저주는 천상의 영혼을 지옥으로 끌어 내릴수 있다.」 영국의 시인 콜리지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