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장삼에 흰 고깔을 쓰고 꽃가사를 양어깨에 맨 상좌가 사방에 배례를 올리며 한 해의 평화를 기원하는 춤사위는 은율탈춤중 두번째 과장에서 펼쳐지는 모습이다.

 일명 상좌춤으로 지역내 연희마다 이 춤의 주인공을 해냈던 이가 현재 은율탈춤보존회장을 맡고 있는 김춘신여사(78ㆍ인천시 남동구 만수1동 102-13 ☎461-9829)다.

 황해도 지방의 대표적 민속예술로 봉산ㆍ강령ㆍ은율지방에 기원을 둔 3대 탈춤은 모두 국가로부터 지정된 중요무형문화재. 실향예술의 경우 대부분 전승지가 서울이라는 기존 관례를 깨고 인천지역에서 처음 복원작업을 시작, 지난 7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된 것이 바로 은율탈춤으로 그 중심축의 대표적 인물이 김여사다.

 『은율탈춤은 내 고향, 내 살과 같은 것이지요. 6ㆍ25전란을 겪으면서 이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됐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더해서 복원작업은 나에게 무엇보다도 절실한 것이었어요.』

 김여사의 출생지는 황해도 은율. 여중을 졸업한뒤 전쟁이 터지기전까지 그녀는 그곳에서 은율탈춤을 배웠다. 그시절 그녀는 외가로 형님뻘 되는 전대주 선생을 따라 온통 탈춤이 생활의 전부였다.흩어진 가족과 동료들이 모이게 된것은 전쟁이 끝난후 한참 세월이 흐른 67년경. 고향에서 함께 탈춤을 추던 장교현. 장용수ㆍ전대주선생과 김씨 네사람이 해후하게 됐고 이들은 자연히 은율탈춤을 복원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기억을 더듬으며 원형대로 춤사위를 되살리는 작업이었지요. 전체 6과장을 어느 정도까지는 살려냈는데 아무리 연습을 해도 전체 구성이 안잡히더라구요.』 그래서 이들이 찾은 이가 봉산탈춤 보유자로 당시 인천에서 활동을 하고 있던 양소운선생. 인천에서 은율탈춤 재현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된 계기다.

 그후 10년동안 이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생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대중들의 외면이 하도 심해서 사람이 무척 그리웠다고 김여사는 당시의 심경을 회고했다. 『모두들 사는 형편이 말이 아니었지요. 그래도 춤을 추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신명에 빠집니다.』

 드디어 78년 2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지만 그때는 이미 전대주ㆍ장교현 선생은 작고한 후로 남아있는 김씨와 장용수선생 2인이 보유자로 지정되게 된다. 등장인물의 의상을 손수 만들어왔던 그녀에게는 상좌춤 이외에 의상제작분야가 더해졌다.

 이때부터는 부흥과 신명의 시간들이었다.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당당히 문공부장관상을 거머쥐었는가 하면, 정기발표 공연에도 많은 시민이 찾아주었고 정식으로 인천이 전승지로 인정되면서 수봉공원 인천문화회관 옆에 전수관도 마련했다.

 『의상을 제작하느라 밤을 새운 일도 많았지요. 그래도 공연이 힘들다는 생각은 한번도 한 적이 없답니다.』

 이제는 기억력도 떨어지고 몸도 예전같지 않아 직접 춤판에 나가지 못한다는 김여사. 그래도 공연때마다 장구로 춤장단 맞추는 악사역은 놓지 않는다. 『한가지 자부하는 것이 있다면 은율탈춤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느 누구도 나를 따라잡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지요.』

〈김경수기자〉 kksoo@inchon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