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생은 만냥을 얻어가지고 집에는 돌아가지도 않고 경기 충청 양도의 접경이요 삼남의 어구인 안성으로 내려갔으며 그는 안성에 머물면서 대추 밤 배 감 귤 추자 등속을 모두 시가의 배를 주고 사더라』 연암의 소설 「허생전」의 한 대목이다. 돈을 빌려 안성장에 내려가 과일을 이를테면 매점매석해서 폭리를 취한다는 내용이다.

 소설에도 나오듯 옛날 안성장은 유명했다. 삼남의 관문이라고 했듯 남쪽에서 서울로 오르는 길이 모두 안성을 통했다. 그러니 자연 물산의 집산지 구실을 했을 것은 당연하다. 서울로 가는 물산이 거치느라 안성은 평양 강경등지와 더불어 전국적인 장시가 될 수 있었다. 그같은 안성장이었던 만큼 안성유기의 전통도 이어졌을 것은 정한 이치였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공장과 장사꾼이 모여들어』라고 안성장을 소개한다.

 유기는 우리말의 놋그릇이다. 구리와 아연을 합금하여 여러가지 기구를 만들어낸 것이 안성유기이다. 구리는 잘 늘어나고 퍼지는 성질이 있으며 아연은 그 단단함이 있다. 안성이 유기의 명산지가 된 것은 안성이 물산 거래의 집단취락을 형성하면서 부터이다. 안성유기의 특징은 우선 견고하고 정밀하게 만들어 진다는데 있다. 그러니 차츰 안성 하면 유기를 떠올릴 만큼 유명한 곳이 되었다.

 「안성마춤」은 생각한 대로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물건을 일컫는 말이며 안성에다 유기를 주문하면 그런것을 구할수 있다고 해서 생겨난 말이다. 「안성마춤」 말고도 안성유기에 관한 속담으로 『경기안성 큰애기 유기장사로 나간다』와 『안성유기 반복자 연엽주발은 시집가는 새아씨 선물감이다』는 것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화려했던 놋그릇은 우리의 생활무대에서 차츰 사라져 간다. 『끝발 좋던 안성유기가 스텐레스에 밀려』 한 안성 출신 임홍재 시인의 시구 처럼 스테인리스의 등장과 생활패턴의 변화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근래 이를 되살리려는 눈물겨운 노력도 엿보인다.

 중앙대 안성 캠퍼스에 유기의 역사를 담을 안성마춤 박물관이 세워지리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