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이 뒤틀어버린 원칙, 일본 우익 반동을 낳다


중일전쟁·태평양전쟁으로
군인·민간인 수천만명 희생

히로히토 처벌 목소리 고조 속
미, 천황제 붕괴 이후 사회 혼란
공산주의 세력 급속 확대 우려
개전 책임자 불기소 방침 결정
A급 전범 28명 기소…7명 처형
이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돼

뉘른베르크전범재판 등 통한
독일의 나치 범죄 처벌과 달리
일제 만행 관련 자기반성 없어
일 극우 반역사적 행태 일삼아

 

▲ 호주 북쪽의 뉴기니 섬에서 일본군에게 강제노역을 당해온 조선인이 1944년 연합군 상륙 후 치료를 받고 있다./사진제공=미국국립문서보관소
▲ 호주 북쪽의 뉴기니 섬에서 일본군에게 강제노역을 당해온 조선인이 1944년 연합군 상륙 후 치료를 받고 있다./사진제공=미국국립문서보관소

◇ 태평양전쟁의 종료

태평양전쟁과 중일전쟁에서 점차 패색이 짙어지고 있던 일본제국 수뇌부는 1944년부터 소련을 중재자로 하는 화평 공작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홋카이도까지 정복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고, 연합군은 일본 본토를 반드시 점령할 필요가 있었기에 일본의 화평 공작은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

당시 일본제국은 결사항전을 뜻하는 '1억 총옥쇄'를 외쳤다. 미군은 이오지마, 오키나와 이 두 전투에서 예상 밖의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미군은 일본 본토 진입의 '몰락 작전'에 앞서 핵무기를 고려하기 시작한다.

미국은 1945년 7월30일에 작성한 '일본의 비밀무기:자살'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일본군이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간다'며 자살 공격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일본은 '완전 소멸급' 위협을 받아야만 항복한다는 견해에 이른다. 이에 따라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핵 투하'가 결정됐다. 이어 8월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됐고,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15일 항복을 선언, 태평양전쟁이 종료됐다.

▲ 일제에 의해 산 채로 생체 해부 실험을 당해 희생된 B-29 승무원들./사진제공=미국국립문서보관소
▲ 일제에 의해 산 채로 생체 해부 실험을 당해 희생된 B-29 승무원들./사진제공=미국국립문서보관소

◇ 태평양전쟁의 야만성·잔혹성

조선인 등을 오키나와의 전쟁터, 군함도 석탄 광산 등에 강제 동원해 치르진 태평양전쟁은 야만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일본군은 미군 포로들에게 죽음의 행진을 시켜 엄청난 수의 사망자를 고의로 양산했다. 술안주 명목으로 1945년 2월 치치지마 섬에서 미군 조종사들을 잡아먹은 사례도 있었다.

태평양 전선에서 전사한 미군은 16만여명이다. 일본의 경우 중일전쟁 이후인 1937~1942년까지 누적 사상자가 30만여명으로 추산된다. 1942~종전까지 입은 일본군 피해는 전사 및 실종자·포로 사망자만 도합 150만여명에 달했다.

중국은 1937년 중일전쟁 개전 이래 무려 8년 동안 일본과 혈전을 펼쳤다. 일본의 전쟁범죄와 무차별 폭격, 전쟁 기간 기아와 질병 등으로 군인 375만명을 포함해 최소 1200만명에서 최대 2200만명이 사망,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 동남아시아에서도 일본의 가혹한 징발 정책에 의한 기아와 질병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300만~400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100만~200만, 필리핀에서 50만~100만, 영국령 버마에서 25만, 포르투갈령 티모르에서 5만~7만, 영국령 인도에서 150만~250만명이 죽었고, 영국령 싱가포르에서도 학살 및 기아로 5만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집단악인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태평양 전쟁의 참상은 유럽보다 훨씬 참혹했던 것이다.

 

▲ 1946년 5월21일, 도쿄전범재판 법정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A급 전범들. 도조 히데키(앞줄 왼쪽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전 총리대신, 오카 다카즈미 해군 중장, 우메즈 요시지로 육군 대장, 아라키 사다오 육군 대장, 무토 아키라 육군 중장, 히라누마 기이치로 전 총리대신, 도고 시게노리 전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 전 외무대신. /사진제공=미국국립문서보관소
▲ 1946년 5월21일, 도쿄전범재판 법정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A급 전범들. 도조 히데키(앞줄 왼쪽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전 총리대신, 오카 다카즈미 해군 중장, 우메즈 요시지로 육군 대장, 아라키 사다오 육군 대장, 무토 아키라 육군 중장, 히라누마 기이치로 전 총리대신, 도고 시게노리 전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 전 외무대신. /사진제공=미국국립문서보관소

◇ 일본 천황에 대한 국제적인 기소 요구

도쿄전범 재판이 시작되던 1946년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소련, 네덜란드, 중국은 히로히토(1901~1989년)를 전범으로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하게 주장했다. 미국의 상하원 의원들이 여론을 반영해 히로히토를 체포하고 전범으로서 재판에 회부하자는 합동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몇몇 미국 워싱턴의 분석가들은 천황의 처벌을 반대하고 나섰다.

 

▲ 자신이 처형될 것을 두려워한 히로히토는 1945년 9월27일 일본 주둔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한 맥아더를 찾았다./사진제공=미국국립문서보관소
▲ 자신이 처형될 것을 두려워한 히로히토는 1945년 9월27일 일본 주둔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한 맥아더를 찾았다./사진제공=미국국립문서보관소

◇ 도쿄전범재판 천황 불기소, 반성 없는 일본

“천황의 의사에 반하여 개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태평양전쟁 개전 당시 일본의 총리대신이었던 도조 히데키(1884~1948년)는 1946년 5월 시작된 도쿄전범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천황 허락 없이는 전쟁을 시작할 수 없다”는 말을 한 일이 있다. 이 발언 직후 미군과 연합군 측은 '해당 발언이 천황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음'을 경고했고, 도조 히데키는 다음번 재판에서 이 말을 철회했다.

또 천황의 측근 기도 고이치(1889~1977년)는 같은 재판부에서 자신의 일기를 제출하며 “진주만 공습이 천황의 재가를 받고 이루어졌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 사실도 재판 중에 묵살됐고 본인 역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종전 후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이 1945년 8월30일 일본에 도착하기에 앞서, 이미 미국은 히로히토 천황과 황족들을 재판에 기소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한 상태였다.

천황제가 무너질 경우, 일본 국내가 혼란에 빠지면서 공산주의 세력이 급속히 확대될까 두려워 아예 불기소 방침을 정한 것이었다. 소련이 이미 8월10일 북한과 만주까지 진주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면죄부들 때문에 일본은 조선 합병·강제동원(1910~1945년), 중일전쟁(1937~1945), 731부대의 생체실험, 위안부 강제동원, 태평양전쟁(1941~1945년) 등에 대한 반성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오늘날 일본 우익들은 제2차 세계대전의 일본 패망 기념일(8월15일)을 상기시키는 것조차 '반일본 활동'으로 인식한다.

독일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선명히 드러난다.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아무리 나치 독일을 비난해도 그것을 '반독일 활동'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일본의 우익들은 일본 '평화헌법 9조'를 수정해, 미래엔 전쟁을 치를 수 있는 국가가 되겠다는 야욕을 키우고 있다.

도쿄전범재판소에서는 A급 전범 28명을 기소했다. 1948년, 전 총리대신 도조 히테키를 포함 7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그리고 16명에 대해 무기금고형, 2명은 유기금고형을 선고했다. 이후 A급 전범들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다.

B·C급 전범은 종전 후 아시아 지역 7개국 49개소에 설치된 미국, 영국, 호주, 네덜란드, 중국 등 5개국의 군사재판소에서 총 5700여명이 재판을 받았다. 그 중 148명이 조선인이었고 그들 중 129명이 포로감시원으로, 그 가운데 14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B·C급 전범 984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도쿄 재판에서는 천황을 면책하고, 이시이 시로 등 731부대로 대표되는 생체실험 의료인 범죄자를 면죄했다. 식민지 지배에 따른 종군 위안부와 강제 연행 등의 비인도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 독일 뉘른베르크전범재판

일본의 전쟁 책임자들을 추궁한 것은 도쿄전범재판(1946년 5월~1948년 11월)이고 독일은 뉘른베르크전범재판(1945년 11월~1946년 10월)이다.

구 서독에서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만이 아니라 자국의 재판소를 통해 지금까지 9만명이 넘는 나치 관계자를 재판에 회부하고 7000 건에 이르는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에 반해 일본에서는 극동국제군사재판과 B·C급 재판, 즉 타자에 의한 판결을 제외하고는 스스로에 대한 판결을 내린 적이 없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지방재판소는 전 나치 친위대원으로 강제수용소 소장을 지낸 요셉 슈밤베르거를 50여 년 전의 연쇄살인과 대량 학살 방조죄로 1992년 5월18일 종신형 판결을 내렸다. 슈밤베르거는 1987년에 체포돼 80세의 나이에 종신형 판결을 받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엄중한 추적이 계속되고 있는 배경에는 '나치 범죄의 시효를 폐지하고 영구히 추궁한다'는 1979년의 구 서독 국회의 결의가 있다.

/김신호 기자 kimsh58@incheonilbo.com

인천일보·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