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 주역들 반인륜 범죄국가의 서막을 열다


미국 필모어 대통령 명령 받은
페리 제독, 함대 이끌고 일본행
1년여의 유예·협상 끝에 개항

'존황양이' 앞세운 4개 웅번들
서구 열강 무력에 '개국론' 선회
막부체제 허물고 왕정복고 앞장

1830년대생 하급 무사 출신들
정신적 지주 요시다 유지 이어
유신 선봉서 군사력 강화 초점
난징대학살 등 만행 기초 쌓아

흥선대원군 국교회복 거절에
사이고 중심으로 정벌론 대두
각의서 부결되자 사임 후 귀향
1877년 세이난전쟁 일으키고
끝내 자결…부대는 자살돌격
생명경시 사상, 학살로 이어져

제국헌법, 국민의 권리 무시돼
▲ 메이지유신을 주도적으로 도모한 사람들은 조슈·사쓰마 등 주로 중앙에서 소외된 지방 번의 하급 사무라이들이었다. 이들은 군사력 강화에 집중한다.
▲ 메이지유신을 주도적으로 도모한 사람들은 조슈·사쓰마 등 주로 중앙에서 소외된 지방 번의 하급 사무라이들이었다. 이들은 군사력 강화에 집중한다.

지금까지 일곱 편의 <일제 강제징용 피맺힌 증언> 연재를 통해 태평양전쟁(1941~1945년) 기간 동안 일본제국이 저지른 조선인 강제동원의 지옥 같은 피해 현장과 그들의 죽음을 살펴보았다.

먼저 남태평양 길목의 오키나와 게라마제도로 끌려와 배고픔과 감금·폭격·자살강요 등으로 숨진 조선인 군부·군속·군인들의 비참한 생활을 장윤만씨의 체험기록을 통해 보았다. 또한 이인신씨 등의 증언을 통해 남태평양 밀리환초에서 발생된 조선인 식인·학살사건의 전모를 알아 보았다. 미군의 전범재판 기록에 나타난 미군조종사 식인사건을 통해, 미친 일본군의 비인간적인 행위를 확인했다.

또한 일제 강제동원의 피해와 죽음을 취재한 재일사학자 박경식, 기록작가 하야시 에이다이 선생의 사진과 인터뷰 결과물 등을 보았다.

일제의 조선침략은 1876년 강화도조약에서부터 시작돼, 1910년 한일강제병합에 이른다. 그리고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공포, 조선인 등의 강제동원을 1945년까지 실시한다.

본보는 일본이 강화도조약에서부터 시작한 조선침략의 전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1854년 미일화친조약 이후 일본의 제국주의화, 정한론 ▲1945~1947년 도쿄전범재판과 냉전체제 속 천황의 생존 ▲21세기 일본의 우주군사대국 야욕과 위험성 등을 3회에 걸쳐 최종 연재하고자 한다.

 

◇ 미일화친조약, 일본의 쇄국체제 종말

1853년, 미국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의 명을 받은 페리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일본에 내항해, 대통령의 개국·통상을 요구하는 친서를 가지고 막부에 이를 요구했지만 막부 측이 1년의 유예를 구했다.

이듬해 1854년 2월13일, 다시 도쿄에 입항해 약 1개월 간의 협의 끝에 3월31일, 총 12개조로 구성된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에 의해 일본은 시모다와 하코다테 항구를 개항함으로써, 쇄국 체제는 종말을 고했다.

 

◇ 일본의 지방세력 4곳 웅번(雄藩), 개국론

'막부'는 사무라이 정권을 가리키는 말이다. 서기 4세기 전반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야마토 정권 이후, 어떤 정권도 '천황제' 자체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1192년 가마쿠라 막부로 처음 시작된 무가 정치는 무로마치 막부를 거쳐, 265년간 일본을 통치한 에도막부(1603~1867년)로 이어졌다.

19세기 중반 일본 무사사회를 지배한 '존황양이' 사상은 천황을 받들고(존황) 외세를 배격(양이)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지방의 강력한 세력인 4곳의 웅번들은 '양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서양의 근대적 무기의 위력을 전쟁을 통해 직접 알게 된 것. '웅번(雄藩)'은 사쓰마번(큐슈 남부), 도사번(시코쿠 남부), 조슈번(시모노세키 일대), 사가번(큐슈 북부) 등 4곳의 지방세력를 말한다.

실제로 1862년 영국인이 사쓰마 사무라이에게 살해당하자, 영국은 사쓰마의 가고시마 만에 7척의 군함을 파견하여 사쓰마번과 전쟁을 벌였지만, 영국의 대포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조슈번 역시 1864년 8월4~6일 시모노세키에서 전투 중, 미국·영국·네덜란드·프랑스 4개국 연합 함대의 공격에 거세게 저항해봤지만, 불과 1시간 만에 120문의 포대가 파괴되기도 했다.

'존황양이'에서 '개국론'으로 전환하게 되면서,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재정개혁에도 성공해 외국의 무기와 배를 사들여 전쟁 준비도 충실히 할 수 있었다.

한편 막부는 1866년 7월 쇼군 이에모치가 병사하고 요시노부가 등극했다. 이어 1867년 막부의 통치권을 천황에게 바치고(대정봉환), 새로운 정부를 만들 것을 선포했다. 이후 아시아에서 일본은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다. 그러나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로 변신해 아시아 각국을 식민지화하며 전쟁과 살육을 일삼게 된다.

▲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주인 요시다 쇼인.
▲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주인 요시다 쇼인.
▲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 사쓰마 출신으로 1877년 정부와의 전쟁인 서남(세이난)전쟁에서 패하자 자살했다.
▲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 사쓰마 출신으로 1877년 정부와의 전쟁인 서남(세이난)전쟁에서 패하자 자살했다.

◇ 메이지유신(1853~1877년 내외)

메이지유신은 일본 메이지천황 때 막부체제를 무너뜨리고 왕정복고를 이룩한 변혁과정을 말한다. 그 시기는 1853년에서 1877년 전후로 잡고 있다.

1868년 사쓰마 · 조슈 · 도사번은 막부 타도의 기치를 높이 들고, 천황의 정치로 돌아간다는 왕정복고령을 발포했다. 천황은 1000년간 기거하던 교토를 떠나 도쿄로 입성했다.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인물들은 하급 사무라이 출신이다. 메이지유신을 이룩한 인물은 거의가 183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중국으로부터 전해오는 아편전쟁의 소식을 들으며 일본의 위기를 걱정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리고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자신의 번을 떠나, 에도와 교토로 올라와 구국운동을 벌인 청년들이었다. 메이지유신의 해인 1868년에 30대였던 그들은 호족인 다이묘의 조언자로서, 새로운 군대 조직자로서 활동했다.

이토 히로부미 등 대부분의 메이지유신 주체들은 폭력적인 양이파로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모두 개국파로 돌아섰다. 그들은 1863년 요시다 쇼인의 유지를 이어, 적을 알기 위해 상해를 거쳐 영국에 밀항했다. 그들은 런던에 도착하자 공장을 보면서 모두 개국론자로 변했다. 무사 출신인 이들은 먼저 강한 군사력을 갖추는데 열정을 쏟았다.

그리고 20세기 초반에는 조선과 중국 등 아시아를 침략하면서 반인륜적인 만행을 시작했다. 이는 훗날 1930~1940년대에 들어서는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난징대학살 등을 비롯, 태평양전쟁 중에는 가미카제와 인육식을 등 온갖 집단악을 일삼는 잔인한 국가의 기초를 만든 것이다.

▲ 1937년 일본군이 난징대학살 현장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 1937년 일본군이 난징대학살 현장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 1937년 12월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에 실린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와 노다 쓰요시 소위가 일본도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수하는지를 겨뤘다는 보도. 패전 후 이들은 중국 난징에서 열린 난징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을 당했다.
▲ 1937년 12월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에 실린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와 노다 쓰요시 소위가 일본도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수하는지를 겨뤘다는 보도. 패전 후 이들은 중국 난징에서 열린 난징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을 당했다.

◇ 강제동원·학살로 이어진 정한론(征韓論)

메이지유신과 더불어 1868년(고종 5년) 일본정부는 그들의 왕정복고를 조선 정부에 통고하고 양국의 국교회복을 청하는 사신을 보내 왔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다스리던 조선은 이를 거절했다. 조선은 '왜왕이 황제라 칭하고 새로운 국새를 사용'한 점을 들어 일본 국서의 접수조차 거부했다. 당장 조선을 응징하자는 정조론(征朝論), 정한론(征韓論)이 들끓었다.

“조선을 반드시 정벌해야 일본의 위신이 선다. 30개 대대를 동원하면 50일 안에 정복이 가능하다.” 일본 외교관이 1870년 제출한 보고서다. 조선인을 끌어다 홋카이도 개발에 투입하자는 논의까지 나왔다.

정한론의 진짜 배경에는 일본 조정의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사무라이들의 반감이 있었다. 무사들은 대놓고 조선과 만주, 중국을 치자고 떠들었다. 명분은 이른바 '진구 황후의 삼한정벌'론이다. 일본의 고서기와 일본사기 등에는 '진구 황후가 신라를 쳐서 신하로 삼으니 백제와 고구려까지 스스로 찾아와 조공을 바치며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는 삼한정벌에 관한 내용이 있다.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 요시다 쇼인도 1854년 '정한론'을 주창했다.

메이지유신 중요 인물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신이 직접 조선에 들어가 국교를 수립하겠다며 사신 파견을 자원했다. 1873년 각의(내각회의)에서 정한론은 부결됐다. 그러자 사이고를 비롯한 정한파에서 5명의 중신이 사표를 내고 정부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한론을 둘러싼 정쟁이 끝난 지 2년도 안돼, 정한론을 반대해온 '내치파'가 윤요호사건을 일으켰다. 정한론은 이미 수용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한론 미수용'을 이유로 사직했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1877년 반란(세이난 전쟁)을 일으켰다. 부상 당한 사이고가 자결한 뒤, 그를 따르던 370여명의 사무라이들은 생명을 경시하는 자살돌격을 감행했다.

이같이 시작된 일본의 정한론은 수십년후 일제의 강제동원과 학살의 결과로 이어졌다.

 

◇ 일본제국 헌법

일본제국헌법은 메이지 천황이 즉위해 있던 시기에 제정됐다. 1890년 11월29일부터 1947년 5월2일까지 시행된 헌법이다. 제정 주체가 군주인 흠정헌법의 성격을 띄고 있으며 일본의 군주인 천황의 불가침적 절대권위를 강조하면서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하였다. 또한 전 국민은 천황의 신민으로 규정되었으며 천황의 신성을 규정하였다. 분명 국민의 권리나 의무가 규정될 수는 있기는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실정법, 그리고 더 나아가 천황의 은혜에 따라 주어지는 것에 불과했다.

/김신호 기자 kimsh58@incheonilbo.com

인천일보-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