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를 저지릅니다. 대리투표가 횡행했으며, 대통령 후보인 이승만과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에 기표가 된 투표용지를 미리 무더기 투입하는 등의 선거 부정이 일어났습니다. 자유당 정권은 금품을 살포해 민심을 왜곡했으며, 정치깡패를 동원해 투표장에 온 시민들을 위협하고 야당 참관인들을 폭력으로 쫓아냈습니다.

이처럼 상상을 초월한 부정선거로 이승만과 이기붕은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러자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나게 됩니다. 부정선거 규탄 시위 도중에 경남 마산에서는 경찰의 집단 발포로 김주열 열사를 포함해 9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부상하는 참극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 규탄 시위가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나 4∙19 혁명의 불씨가 됩니다.

부정선거뿐만 아니라 국민을 더욱 분노하게 한 것은 이승만 정권의 사주를 받은 정치깡패의 무자비한 폭력과 경찰의 발포였습니다. 경찰과 정치깡패는 비무장한 평화 시위 군중에게 총탄을 퍼붓고 흉기를 휘둘렀습니다. 이들의 폭력으로 시민과 학생 183명이 죽고 무려 6529명이 다칩니다.

▲ 1960년 4월 21일 인천 중고생이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사진 제공=조우성 전 인천일보 주필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폭력에 대해 인천 시민과 학생들도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부정선거가 정점에 올랐던 3월 14일 인천에서 첫 민주주의 요구 횃불이 타올랐습니다. 이날 인천 송도고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와 공명선거 실시와 학원 자유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학생들의 시위에는 시민들도 합세해 시위대는 200명으로 불어났습니다.

4월 17일에는 민주당 당원 100명이 당사 앞(현 애관극장 앞)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퇴각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다가 경찰의 강제 진압으로 21명이 연행되기도 했습니다.

4월 19일에는 인천항 부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했습니다. 노동자와 시민, 학생들은 자유공원과 동인천역 광장, 제물포역 광장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인천공고(현 인천기계공고) 학생들도 학교 밖으로 뛰쳐나와 숭의동 일대에서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침묵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 인천은 여학생들이 시위에 앞장 섰다. 인천여고 학생이 인천시청 앞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고 있다./사진 제공=조우성 전 인천일보 주필

4∙19 혁명 과정에서 인천의 시위가 서울이나 광주 부산 마산 등과 다른 점은 인천에서는 여학생들이 가장 먼저 시위에 참여한 것입니다. 4월 19일 인천 남인천여중과 인천여자상업고 학생들이 시위에 앞장 섰습니다. 이어 인천여고 학생들도 시위에 동참했습니다.

4월 21일에는 제물포고 학생들과 인하대 학생들이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합류하며 시위는 절정에 달하게 됩니다. 인천지역 학생들은 싸리재(현 경동), 답동광장, 내동 거리를 비롯해 동인천역, 중앙동 일대에서 이승만 정권에 저항하는 횃불을 들고 연행된 시민∙학생 석방과 정∙부통령 선거의 재선거를 요구하는 가두 행진과 연좌시위를 벌였습니다.

/조혁신 기자 mrpe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