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버스는 동서우유를 지나 신기촌과 주안역을 돌아 시내로 나가고 있었다. 제물포쯤이었을까? 화들짝 놀라 깨었는데 주위는 온통 코 큰 사람들이었고 버스 안은 외국어가 난무했다. 버스 속 선잠에서 나는 인천과 키예프를 혼동하고 있었다.

여기는 38번 키예프대학과 우리 동네를 운행하는 버스였는데 나는 인천에서 5번 버스를 탄 착각 속에서 잠깐 잠이 들었던 것이다.

아! 인천, 학창 시절 인천의 거의 모든 버스는 동인천을 돌았었다. 1번 부평~ 동인천 경유 월미도, 2번 효성동~동인천 경유 하인천, 3번 학익동~ 동인천, 4번 문학~동인천, 5번 신기촌~동인천 경유 하인천(후에 인천교), 6번 송도~동인천, 9번 독쟁이~ 동인천, 15번 새마을~동인천, 16번 만수동~동인천, 17번 검단~동인천, 19번 남동~동인천, 20번 고잔~동인천 21번 소래~동인천, 41번 율도~동인천 경유 부평, 45번 박촌~동인천 (1970년대 말 필자의 기억으로 기억의 오류가 있을 수 있음)

동인천은 인천의 심장이었다. 인현동, 신포동, 신흥동, 화수동, 송현동, 송림동, 율목동을 연결하는 중심축이었고 축현, 창영, 신흥, 송현, 송림국민학교와 대건고, 송도고, 제물포고, 인성여고, 인일여고, 인천여상, 인천여고가 근처에 있었고, 인현 통닭, 삼치 집, 냉면 거리, 빵집과 제과점, 신포동 튀김집, 용동 큰 우물집 등과 말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애관, 미림, 오성, 동방, 키네마극장 등이 즐비했던 인천의 교육, 문화, 유흥, 음식 중심지였다. 꿈에 그리는 거리거리… 공기 냄새부터가 다른 곳. 키예프에 살면서 가끔 인천과 혼동할 때가 있다. 요즘은 키예프에서 인천교통방송을 들으며 운전하고 있으니 몸은 키예프에 있으나 맘은 인천을 배회하고 있다.

키예프는 동유럽에서 나무가 많은 녹색의 도시이다. 도시 전체가 공원이며 박물관이다. 신경림 시인은 이렇게 시를 쓰셨다.


도시가 숲속에 들어앉았다. / 전체가 공원이다.

국립 끼예프대학도 공원 안에 있고/ 쏘피아 성당도 공원 안에 있다.

공원을 둘로 가르며 흐르는/ 널따란 드네쁘르강이 아름답다.

(“드네쁘르강, 아름답고 아름다운”의 일부)


10·11세기 동유럽에서 가장 번화하고 문명이 발달한 곳이 키예프였다.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당시 지어진 성 소피아 대성당이나 페체르스크 라브라 수도원을 보면 그 규모의 웅장함과 지고한 역사에 고개가 숙여진다.

1240년대 한반도 끝부터 동유럽까지 몰아친 몽골군의 공격으로 완전 폐허가 되기 전까지 키예프는 주변 포함 인구 20만이 넘는 풍요롭고 문화가 번창한 고도였다. 240여 년간 몽골 지배하의 핍박을 피해 북쪽으로 이주하며 모스크바 공국을 세웠고 그 후 키예프는 러시아의 어머니라는 소리를 듣는다.

몽골군이 물러난 후에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터키, 크림 타타르, 러시아 등 주변 여러 나라의 침략과 수탈을 당했다. 그러면서도 언어와 전통과 문화를 지켰고 키예프는 21세기 인구 300만이 넘는 동유럽의 중심으로 다시 한번 기지개를 켜고 있다.

잠자리에서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본다. 동인천에서 내려 배다리 쪽으로 걸어가 아벨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사고 창영국민학교를 둘러보고 내려와 과일가게를 지나 인현 통닭에서 치맥 한잔하고, 대한서림에서 다시 책 한 권을 사고, 삼치 집에서 막걸리 한잔하고, 자유공원 쪽으로 올라가며 대동 학생백화점에서 볼펜 한 자루 사고, 쭉 올라가다 홍예문 다리 전 신신분식에서 쫄면을 먹고 맥아더 동상을 둘러보고 중국인 촌으로 내려와 아버지와 짜장면 먹었던 중화루에서 짜장면을 먹고 신포 시장에서 닭강정 한 점과 튀김을 먹고 송현동 순대거리에서 순대 한 점에 소주 한잔 걸치고 걸어서 걸어서 키예프로 돌아오는 꿈.

 

/김석원 국립키예프대 교수

#김석원 교수는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 남중학교, 대건고를 거쳐 한국외국어대 노어과를 나왔다. 키예프 국립대에서 우크라이나 문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 1998년부터 이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문학과 우크라이나 비교 문학' 등의 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