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도 뒤로하고 철마는 근대화 레일 위를 달렸다


경부철도창설조약 무산 배상 차원
1896년 3월29일 모스 부설권 획득
1899년 거금 주고 권리 손에 쥔 일본
경인철도합자회사 세워 공사 본격화
9월18일 인천 떠난 첫차 노량진 도착
한강 홍수로 교각 떠내려가는 바람에
철교 부설 지연돼 반쪽짜리로 첫 출발
1900년 7월8일 경성역까지 완전 개통
▲ 경인철도 설계도면.
▲ 경인철도 설계도면.

인천에서 기적 소리를 울리며 시작된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

우리나라 철도의 시발지가 인천임은 자명하지만 1900년도 들어서 경인선의 무게 중심은 인천에서 경성으로 기운다.

이런 경인철도가 '경인선'이라는 공식 명칭을 얻은 과정부터 수도권 전철 운행으로 큰 변곡점을 지나기까지 경인선의 어제와 오늘에 대해 인천일보 기획전문위원인 배은선 오류동역장이 2회에 걸쳐 싣는다.

▲ 경인철도 개업예식(1899. 9. 18.).
▲ 경인철도 개업예식(1899. 9. 18.).

▲경인철도 개통일은?

한 나라에서 철도가 맨 처음 달리게 된 계기나 과정을 중요시하는 까닭은 그것이 자의에 의해서였든 타의에 의해서였든 근대화의 한 척도로 보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우리나라 철도는 1899년 9월18일, 인천에서 노량진까지 경인철도가 첫 운행을 시작한 것이 효시다. 물론 그것은 온전한 경인철도가 아닌 부분개통에 불과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첫 기적을 울린 기차의 의미가 퇴색되거나 사라지는 건 아니다.

1900년 7월8일, 인천을 떠난 기차는 드디어 한강을 건너 한성부로 진입했다. 용산역, 남대문역을 거쳐 경성역까지 철도가 뻗어 나간 것이다. 비로소 인천부와 경기도 시흥군을 이어주던 반쪽짜리 철도가 대한제국의 수도 경성과 그 관문인 인천부를 연결해 줬다. 이날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진정한 경인철도 개통일이다.

▲ 경인철도 전선개통식(1900. 11. 12.).
▲ 경인철도 전선개통식(1900. 11. 12.).

▲우리나라 경인철도 부설권, 미국에서 다시 일본으로

이 나라 철도는 어떻게 처음 놓이게 되었을까?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며, 연구자에 따라 조금씩 의견이 다르다. 그중에서 공통으로 동의하고 있는 부분은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은 해외 각국이 한반도의 금광, 은광, 산림개발과 함께 철도부설에도 큰 관심을 갖고 각축을 벌였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에서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 개발할 수 있는 기술이나 인력, 자본이 부족했기 때문에 되도록 움켜쥐고 있다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렸을 때 좀 더 우리에게 유리한 쪽에 특권을 내주는 궁여지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1896년 3월29일, 조선은 미국인 모스(James R. Morse)에게 경인철도 부설권을 허가했다. 이때는 을미 사변 후 고종이 일본을 피해 러시아공관에 머물고 있던 아관파천 시기였다. 당시 미국공사관 서기관이었던 앨런(Horace Newton Allen)은 러시아공관을 오가며 고종을 상대로 이권 획득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때 미국이 얻은 가장 큰 이권이 운산금광 채굴권이었으며 두 번째가 경인철도 부설권이었다.

경인철도 부설권이 일본이 아닌 미국에 허가된 것에 대해서는 또 다른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1892년 고종이 모스를 초청해 이하영과 이완용 등에게 경부철도창설조약을 체결하라고 지시한 것과 관련이 있다. 이때 일부 대신의 반대 때문에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는데, 모스는 조선 정부에 대하여 막대한 손해배상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결국 경인철도 부설권 허가는 배상 성격으로 주어졌다고 하는 주장의 근거가 여기에 있다.

모스가 경인철도 부설권을 따내자 일본은 '경인철도인수조합(京仁鐵道引受組合)'을 결성해 부설권 확보를 위한 치열한 협상에 들어간다. 마침 모스는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 기공식조차도 실효(失效) 기한(1897. 3. 28.) 1주일을 남기고 겨우 치르는 상황(1897. 3. 22. 우각현)에 놓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 쪽에서는 “일본이 조선에 곧 전쟁이 난다는 헛소문을 퍼트려 자금 모금을 방해했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주장이다. 다만, 모스가 부설권을 확보한 후 러시아와 프랑스 쪽을 오가며 부설권 양도양수를 추진하다 결국 일본에 거금을 받고 넘긴 상황을 보면 그가 진심으로 철도 건설에 대한 의지가 있었는지 의심하게 된다.

1898년, 모스로부터 마침내 부설권을 손에 넣은 일본은 인수조합을 해산하고 '경인철도합자회사'를 세워 본격적인 공사에 나섰다. 이 철도는 부설허가 이전부터 건설에 이르기까지 한일 양국 정부의 개입과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외형상 사설철도였다. 따라서 '경인선(京仁線)'이 아니라 회사 이름을 따서 '경인철도'라고 불렀다. 경인철도는 1903년 10월 경부철도주식회사에 인수합병 되고, 1906년에는 일제의 방침에 따라 국유화 과정을 거쳤다. 인수합병 이후 국유화 전까지는 '경부철도주식회사 경인선'으로 불렸다. 물론 국유화 이후부터는 '경인선'이 공식명칭이 됐다.

▲인천∼노량진 반쪽짜리 철도

경인철도 건설공사는 인천에서 시작해 서울 쪽으로 진행됐다. 설계상 한강 건너 북쪽으로는 용산·남대문·경성역이, 한강 이남에는 노량진·오류동·소사·부평·우각동·축현·인천역이 있었다. 가장 큰 난관은 폭이 1㎞를 넘는 한강에 철교를 놓는 것이었다.

인수절차를 마친 조합은 기공식을 다시 치르고 본격적인 공사에 나섰는데, 큰 홍수로 교각 일부가 떠내려가는 바람에 공사가 많이 지연됐다. 이로 인해 제국의 수도 경성과 그 관문인 인천을 철길로 이어주고자 계획된 경인철도는 경기도 시흥군의 노량진과 인천을 잇는 반쪽짜리 철도로 시작하게 됐다.

▲ 배은선 기획전문위원·오류동역장.
▲ 배은선 기획전문위원·오류동역장.

/배은선 기획전문위원·오류동역장

/정리=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사진제공=배은선 기획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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