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자들은 국가조직의 응집력을 높이기 위해 외부의 적에 대해서는 '집단 증오'를, 자국민들에 대해서는 '나르시시즘'을 부추겼다. 그 결과 일반국민들조차 환각에 빠졌고 엄청난 살육행위에 동참했다. 1933년 독일수상이 된 히틀러는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공격함으로써 독일 내부의 문제를 유대인에게 모두 떠밀어 버릴 수 있었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1914~1918년)이 끝난 후 독일은 대공황이 찾아왔다. 패전국으로서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 하고, 전쟁으로 온 국민의 자존감은 땅에 떨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도 독일내의 유대인들은 경제와 사회적인 측면에서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당시에 유대인은 독일 인구의 1%에 불과했는데 금융과 정치, 언론, 의료 분야에서 상위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일자리가 없어 어렵게 지내는 대다수의 독일국민들에게 유대인에 대한 비난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독일의 경제가 나빠질수록 비난과 원성, '집단 증오'의 화살이 유대인에게 쏠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치스는 유대인과 폴란드인들을 열등 민족으로 규정하는 수단을 썼다. 이로써 자신들 게르만족은 우수하다는 '나르시시즘'을 국민들에게 심었다.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은 자민족 정화를 위한 타인종 청소를 시도한 것으로, 게르만족의 피를 깨끗이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유대인은 사라져야 한다는 논리였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폴란드인들과 슬라브계 민족들, 집시, 그리고 동성애자와 정신장애자도 블랙리스트에 있었다. 무서운 것은 이 끔찍한 학살에 지극히 평범한 독일의 일반인들도 동참한 반인륜적인 행위였다는 것이다.

일본 관동대지진은 1923년 9월 도쿄를 비롯한 관동지방에서 발생해 10여만명 이상이 사망한 최악의 재난이다. 당시는 러시아혁명 이후, 일본 내부에서 경제공황으로 노동운동·농민운동·부락해방운동이 사회의 저변을 뒤흔들고 있던 시기다. 이때 일어난 대지진으로 민중이 공황 상태에 빠져자 일본 군부와 군국주의자들은 역설적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라 여겨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을 희생양으로 내세웠다.

삽시간에 유언비어들과 함께 일본 사회의 내부 불만은 재일동포들에게 향했다. 일본 각지에서 조선인들이 군경과 주민들에게 학살됐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독립신문 특파원이 조사 보고한 바에 의하면 도쿄에서 752명, 가나가와현에서 1052명, 사이타마현에서 239명, 지바현에서 293명 등 각지에서 6661명이 피살된 것으로 조사됐다.

이와함께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나르시시즘에 빠져 자신들을 '일등 국민'이라고 자부했다. 일제 군대를 '위대한 황군'이라고 불렀다. 여기에 태양을 형상화한 욱일기를 들었다. 이렇게 집단적으로 '일등'의 환각상태에 빠지게 된 일본군 지휘부는 1944~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병사의 목숨을 소모품처럼 여기는 자살전투기와 자살특공보트를 이용한 '가미카제 자살공격'을 감행하도록 했다. 가미(神)는 신, 카제(風)는 바람이라는 뜻으로 '신이 일으키는 바람'이라는 뜻이다. 자신들이 '신의 자식'이 된다고 착각한 듯하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전을 선포한 날까지 10개월 동안 진행된 가미카제 희생자는 38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이 중 신원이 확인된 조선인 희생자도 18명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가미카제의 공격으로 30척 이상의 연합군 군함과 350척이 넘는 전함이 피해를 입었으나 주요 목표물인 항공모함은 침몰시키지 못했다.

가미카제는 국가가 주도해 조직한 '전체주의 인간폭탄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어떤 사례와도 다른 악랄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전술의 비윤리성은 당시 인간성을 상실한 광기가 만연하던 일본 제국주의의 모습 그대로다.

일본은 2019년 반인륜적인 가미카제 자살특공대의 유서를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하려 했으나 심사에서 탈락했다. 어처구니없다. 일본은 강제동원된 희생자 조선인과 유족에게 사과부터 하기 바란다. 일본의 정치인과 황실은 '천황은 가미(神)와 동격이어서 사과할 일이 없고, 한국은 아직도 무시할 만한 대상'이라는 오만한 생각을 가진 듯하다.

 

/김신호 경제부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