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 임치정 선생 신민회 창립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 활동
뇌출혈 순국…활동중 재산 동나
어린시절 일제 피해 잦은 이사

임영희씨, 3남매 홀로 키워
낡은 빌라로 버텨온 세월 짐작
“할아버지 활동 재평가 감사”

3.1운동 102주년을 앞두고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초고령의 나이로 쓸쓸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낌없이 재산을 내놓은 독립유공자의 희생으로 후손들은 기울어진 가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지난 23일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 5층짜리 낡은 빌라를 찾았다. 빌라는 인근 지역에 빼곡히 들어선 주차 차량 사이로 작은 입구를 드러냈다. 입구 한 편에 늘어진 거미줄은 빌라가 버텨온 세월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줬다.

빌라 반지하 1층 문을 두드리자 임영희(92·여)씨가 미소로 반겨줬다.

임씨의 “어서 오라”는 말에는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을 맞는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임씨는 독립유공자 임치정 선생의 손녀다. 아버지는 임치정 선생이 낳은 3남매 중 장남이며, 어머니 사이 5남매를 뒀다.

임씨의 집은 주방 겸 거실과 침대가 있는 방 한 칸으로 구성돼 있었다.

침실이 있는 방에는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장롱과 수납장 등이 있다.

▲ 독립유공자 임치정 선생. /보훈처
▲ 독립유공자 임치정 선생. /보훈처

임치정 선생은 1880년 평안남도 용강군 산남면에서 출생한 독립유공자다. 그는 1903년 하와이 노동이민에 자원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미주생활을 시작하며 구국정신 고취와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한 미주 최초의 정치운동단체 '신민회'를 창립했다. 1904년 신민회가 해산된 후 미 본토로 자리를 옮겨 안창호 선생과 함께 '공립협회'를 만들었다.

그러다 1907년 10월 24일 국내로 돌아와 <대한매일신보>사에서 일하며 새로운 신민회 창립회원으로 활동했다. 1910년에는 105인 사건으로 체포돼 1년간의 수감 생활을 겪기도 했다. 이후 각종 사회운동과 언론운동을 벌이다 사회적 여건에 맞물려 번번이 노력이 좌절되던 중 1932년 뇌출혈로 순국했다.

▲ 독립유공자 임치정 선생이 1910년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된 후 받은 판결문. /국가기록원
▲ 독립유공자 임치정 선생이 1910년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된 후 받은 판결문. /국가기록원

임 선생이 활동하던 동안 집안의 재산은 모두 거덜 났다.

임씨가 황해도 진남포에서 태어난 1930년도에는 낡은 초가집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임씨의 아버지는 임치정 선생의 후손이라는 추적을 피하기 위해 어린 시절 서울과 만주, 해외 등으로 잦은 이사를 했다. 해방 당시에는 서울시 사직동 근처 방 3칸 한옥에 3남매와 가족이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광복 후 한국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임씨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중국으로 넘어가 사망할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임씨가 중년에 접어든 나이에서야 유골함에 담긴 채로 고국을 밟았다.

아버지가 중국에 간 사이 임씨는 스스로 삶을 개척했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난 남편을 뒤로하고 3남매를 혼자 키웠다. 회사원이자 어머니로서 삶을 살았다.

임씨는 임치정 선생의 마지막 모습을 함께 봤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삶은 잘 알지 못한다.

임씨는 “집안에서 할아버지가 어떤 일을 했는지 말하는 건 금기였다. 나이가 든 후에야 할아버지가 자랑스러운 독립유공자라는 것을 알았다”며 “그래서 기억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단지 어머니께 '포근하고 친절하신 분이었다'는 말만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마음속으로 항상 할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겨왔지만, 그간 어디에 말할 곳도 없었다”며 “나이가 든 지금에야 할아버지의 활동이 평가되고 있어 감사한 마음”이라고 덧붙였다.

/김중래 기자 jlcomet@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