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부터 전주를 거쳐 제주까지 5개월의 영화 노마드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 VR(Virtual Reality)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전주 한옥마을 내 한옥 게스트하우스에 한 달 넘게 머물던 지난 가을과 초겨울은 노란 은행잎과 Andrea Corr의 'Pale Blue Eye' 그리고 VR 편집 프로그램인 'Mistika Boutique'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랜덤으로 완행버스를 타고 2시간30분을 질주해서 도착한 화엄사도 기억에 남는다.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을 못 본 것은 무척 아쉬웠지만, 머물지 않고 움직여야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배운 시간들. 그 가을의 정서가 곧 김개남 장군 소재의 360°VR 단편영화 '초록바위'로 만들어질 것이다. 조만간에 '초록바위'에 출연하는 대학로 최고의 배우들과 첫 미팅을 앞두고 있어 더욱 설레고 기대된다.

그리고 겨울에서 초봄을 보내고 맞이하고 있는 제주 생활 한 달도 마무리되어간다. 차가운 제주 북풍 속의 땡그랑 땡그랑 울려 퍼지는 풍경소리가 귓전에 머문다.

1947년 3월부터 1954년 9월까지 7년7개월 동안 약 800명(실제는 1500명에서 2000명)의 어린 영혼들이 여기저기서 스러져 갔고 그 스러진 영혼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설치한 풍경 소리, 그리고 차가운 북풍에도 의연히 견뎌내고 있는 동백꽃보자기의 곤밥(쌀밥)과 바람개비를 통해 삶의 애잔함과 간절함과 처연함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며 감사와 미안함이 교차한다.

촬영을 위해 차가운 흙바닥에 누워 참아 냈던 8살 아이들의 꿋꿋함은 세대와 지역 그리고 인종을 넘어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보편의 인간애와 인간됨'의 작은 발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적은 출연료를 고스란히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해 준 어린 영혼의 넉넉하고 품 넓은 마음이 대가와 거래에 익숙한 어른을 부끄럽게 만들기도 하였다.

바닷가 근처 제주 생활은 집중과 회복의 공간으로서 최적의 장소였다. 10일 동안 239신(Scene) 장편극영화 시나리오를 쓰게 해줬고 [폭낭의 아이들] 3차 '매장'편과 4차 '동백童白'을 무탈하게 작업하게 해주었으며, 오랜만에 만난 '이름없는 공연팀'과의 재회, 출연진과의 '비오는 날의 번개팅' 그리고 '나와의 소통의 시간들' 모두가 참으로 고마운 시간들이었다.

한편 우연하게 라디오에서 들었던 제주 민요 '산천초목'은 맑고 청아한 소리꾼 강권순이 부른 정가로, 보름달이 뜰 때 바람 좋은 야트막한 오름에서 춤을 추고 싶은 곡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듯하다.

 

산천초목 속잎이 난데 구경 가기가 얼화 반갑구나

꽃은 꺾어 머리에 꽂고 잎은 따다가 얼화 입에 물어

날 오라 하네 날 오라 하네…

산골처녀가 얼화 날 오라한다

 

이제 다시 길을 나선다. 정주가 아닌 다른 떠남을 통해 또 내 영혼의 고요함과 고독감으로 자연에 녹아들려고 한다. 초목을 누비던 노마드족은 이제는 영혼의 자유로움을 찾아 갈급함의 길을 떠나는 문화 유목민으로 변용되고 있다. “나의 떠남은 내 허물을 벗기 위함이요, 내 영혼의 상함을 치유하기 위함이리라.”

 

/사유진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