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개화기 문물이 많고, 등대·호텔·기상대·염전·짜장면 등 '최초 시리즈'로 유명하지만 출중한 여성이 다수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근대 이후 인천 여성들의 활동은 독립운동 및 여성운동에서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제한된 시대상황에서 문화·교육·예술 분야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김란사(1872∼1919)는 1896년 미국 웨슬레이안 대학으로 유학가 1900년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했다. 자비로 유학한 첫 학생이며, 한국 최초의 여성 학사학위 취득자다. 1906년부터 이화학당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여성계 지도자로 활약하다가 일본경찰의 요시찰 대상이 됐다.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 우리나라 여성대표로 참석하려는 계획이 경찰에 알려져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북경에서 사망했다.

안인애(1893∼미상)는 1927년 창립된 항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에서 활동하면서 여성권익 신장, 문맹 퇴치, 항일학생운동 지원 등을 펼쳤다. 광복 후에는 인천애국부인회를 발족시키는 등 대표적인 여성운동 지도자다. 이옥경(1901∼1982)은 일본 동경의 일본여자음악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27년 개국한 경성방송국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 아나운서가 됐다. 그의 차녀 노라노(본명 노명자)는 한국 최초의 여성 패션디자이너로 우리나라 옷문화 발전에 공을 세웠다.

조인애(1883∼1961)는 강화 출신으로 남편 유봉진과 함께 1919년 3월18일 강화읍 장날 독립운동을 주도했다가 징역6월을 선고받았으며, 최선화(1911~2003)는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교편을 잡다 1936년 중국으로 가 흥사단 중국지부에서 활동하면서 여성_청소년 계몽과 교육에 힘을 쏟았다.

이성자(1918~2009)는 1950년 프랑스로 유학가 아카데미 그랑쇼미에르에서 미술을 공부한 뒤 59년간 작품활동을 한 세계적인 화가다. 그가 아틀리에(작업장)로 사용한 별장은 프랑스 정부에 의해 20세기 역사건축물로 지정되었을 정도다.

이 밖에도 많은 인천 여성들이 역사 속에 발자취를 남겼다. 인천 개항과 서구문물 수용,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격동과 질곡의 한국 근대사 이면에는 유교의 굴레를 벗고 길을 개척한 선각자적인 '인천 여성들'이 있었던 것이다.

위의 인물들은 지역 역사서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지난해 설립된 인천여성사연구소가 찾아낸 것이다. 그동안 인천 여성 평가에 얼마나 인색했는지 알 수 있다. 하다못해 김구 선생이 인천에서 잠시 감옥생활을 한 것을 두고, 인천과의 인연을 부각시키려 지자체와 사회단체가 전방위로 애쓰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런 데까지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떠올려야 하는가.

/김학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