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멸시에도 흉중엔 천하경륜 식견 품다
▲ <수원유생우하영경륜>,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 <수원유생우하영경륜>,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2021년 2월, 나라가 시끄럽다. 코로나19 정국으로 하루 살아내는 것조차 힘들다. TV만 켜면 한 사발도 되지 않는 깜냥으로 세상만사 전지전능한 듯 말인지 됫박인지 설레발치며 어불성설 호기롭게 내뱉는 수준 이하 자칭 논객들, 온통 먹자타령에 처첩간의 갈등 드라마와 조상님보다 숭배 대상이 된 개·고양이 동물농장과 호들갑을 떠는 연예인 관음증, 반백년 전 노래를 거푸 내보내 국민의 의식을 영구히 박제화시키는 것을 품격 높은 미디어의 사명이라 믿고 오매불망 시청률 올리기에 치성드리는 방송도 모자라, 글 한 줄 말 한 마디 천 근 활을 잡아당기듯 해야 할 언론인들이 찌라시급 뉴스 주워 모아 정론이라며 자음 17자 모음 11자를 '가을 도리깨질하듯' '조자룡 헌 칼 쓰듯'하니, 그 훌륭한 바른 언론을 전달하는 훈민정음도 곡을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저 시절, 이런 때면 임금은 백성들에게 구언(求言)을 하고 신하는 상소(上疏)를 하였다. 여기서 언필칭 상소라 함은 처절하고도 서슬 퍼런 심정에 '오두가단(吾頭可斷, 제 말이 안 맞으면 제 머리를 자르옵소서!)' 각오로 도끼 하나 옆에 놓고 골수에 박힌 나랏병을 고쳐달라는 언론(言論)이다. 1796년(정조 20) 수원 화성(華城)이 축성되던 해가 그러하였다.

정조는 1791년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전격 실시하였다. 신해통공은 육의전을 제외한 일반 시전이 소유하고 있던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누구나 자유로운 상행위를 할 수 있게 한 정책이다. 금난전권은 국역을 진다는 조건으로 육의전과 시전 상인이 서울 도성 안과 도성 밖 10리의 지역에서 난전을 금지하고 특정 상품을 독점 판매할 수 있는 권리였다. 독과점이기에 이 육의전의 폐단은 이루 형용키 어려웠다. 정조는 이 금난전권을 비단·무명·명주·모시·종이·어물 등 6종류의 상품에 대한 육의전만 남기고 모두 없앴다. 이른바 그들만의 리그를 혁파하여 조선의 경제를 개혁해보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부 상업은 성장하였으나 백성들의 궁벽한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러자 정조는 백성들에게 구언을 하였고 이때 유생 우하영이 올린 상소가 바로 <천일록>이다.

우하영의 자는 대유(大猷), 호는 취석실(醉石室), 성석당(醒石堂)으로 현재의 화성시 매송면 어천리 출신이다. 선생이 즐겨 쓴 호 '취석'은 여산(廬山) 앞을 흐르는 강물 가운데 있는 반석이다.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이 술에 취하여 이 바위에 누워 잤다 하여 이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즉 '술에 취해 취석에 누우면 구태여 신선이 될 필요가 없다'는 의미쯤이니 선생의 삶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선생의 본관은 단양(丹陽), 실학자 겸 농부이고 여행인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정서(鼎瑞)인데 큰아버지 정태(鼎台)에게 입양되었다. 아버지 3형제에게 아들은 오직 선생뿐이어서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입양된 것이다. 당파는 힘없는 남인이고 3대 동안 벼슬이 끊어져 평생 신세가 곤궁하였다.

어린 시절 7세 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사략>을 하루에 12줄씩 읽었다. 10세 때 할아버지가 별세하자 글을 배울 수 없었다. 집에 큰불이 나서 가세는 곤궁하였고, 그나마 있던 책도 전부 불에 타버려서 글공부도 못하였다. 이 시기쯤 양자로 입양된 듯하다.

그러나 선생의 이상과 컸고 기개는 꽤나 강개했다. 현인군자들처럼 “천하를 경륜하는 데 뜻을 두리라”(經綸事業)하였다. 또 인생 백 년도 못 된다며 “이름과 행적을 죽은 뒤에 남겨야겠다”(留名與跡於身後)고 다짐장을 스스로에게 놓았다. 선생은 <취석실주인옹자서>에서 이것이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온 이유로 들고 있다. 이런 면면으로 선생은 인생경영으로서 글쓰기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큰아버지에게 입양된 뒤에도 한동안 글공부를 하지 못하다 15세 때부터 과거 공부를 다시 시작하였다. 그해 가을 감시(監試, 사마시 초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그 후에도 선생은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회시(會試)만 모두 12번이나 떨어졌고 생활은 더욱 궁핍하여 조석으로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천일록>을 지은 선생의 능력으로 보건대 저토록 과거에 낙방한 이유를 어디에서 찾아야할까? 굳이 답할 필요가 없기에 독자들의 문견(聞見)에 맡긴다.)

55세 되던 1796년(정조 20) 조정에서 구언교서(求言敎書)가 내리자 선생은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여 책자로 만들어 바쳤다. 63세인 1804년(순조 4), 구언 때 이를 다시 보완하여 <천일록>이라는 제명으로 조정에 상정했으나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전자는 <수원유생우하영경륜(水原儒生禹夏永經綸)>이라는 제명으로, 후자는 <천일록>이라는 표제로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었다.

선생은 71세인 1812년(순조 12)에 한 많은 삶을 마쳤다.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숙곡리에 있다. 선생은 평생 궁벽하였고 사람들에게 꽤나 모욕을 받았다. 2060자로 삶을 정리해놓은 '취석실주인옹자서'에서 그 모욕과 멸시를, 선생은 이렇게 담담히 묘사하고 있다.

“다른 사람이 모욕하고 멸시해도 모욕하고 멸시하는 까닭은 진정 나에게 달려 있다. 나는 이런 일을 당해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모욕과 멸시를 받으며 구차하게 그들을 좇아 살기보다는 차라리 그들과 교류를 끊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였다. 만나는 사람도 거의 없고 경조사도 모두 끊었다. 본래 좋아하던 산수유람 즐겨 전국에 걸쳐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